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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Feb 27. 2021

오디오북은 신대륙의 발견일까?

읽기 예찬론자의 중얼거림


오디오북 시장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고 한다. 지인 한 분은 오디오북 시장을 겨냥하여 유명 성우가 진행하고 운영하는 '낭독 교실'에 줌으로 참여하고 있다. 각 오디오북은 낭독자를 달리하여 시장에 내놓으면 마음에 드는 버전을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게 되는 시스템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시각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독자, 또는 문자로서의 책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에게 누군가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꽤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요즘 뜨거운 감자인 '클럽하우스'도 듣기 기반인 SNS인 것을 보면 비디오와 오디오 시대가 보조를 맞추어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고개를 드는 의문은 '책 듣기'를 과연 독서라고 할 수 있을까? 즉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책을 듣는다는 행위와 완전하게 포개어질 수 있을까? 책 읽기와 책 듣기는 합동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위치한 벽도 사실 무너뜨리기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완벽히 적응해서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처럼 종이와 화면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 경우 툴만 다를 뿐 문자를 '읽는' 행위는 다를 바 없기 때문에 툴에만 적응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과 책을 듣는 것의 차이는 이중언어를 넘어서 전혀 다른 종의 바디 랭귀지를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괴리가 있는 것 같다.





​사람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기 위함이 아니다. 같은 개념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 저자의 탁월한 글솜씨에 감탄하고 마음을 뒤흔드는 문장을 발견하는 데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어떠한 문장에 감탄하는 이유는 그것이 '문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문자화 된 말에는 구어가 가질 수 없는 형태적인 미학이 들어있다. 적재적소에 명확하면서도 신선한 단어를 배치하여 완성된 하나의 문장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공중에 흩어지지 않는다.




또한 책을 읽을 때 나의 뇌는 빠르게 자극받아 움직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과 만날 때가 참으로 많다. 그 같은 순간들이 자주 찾아오는 책은 내 안에서 '정말 좋은 책'이라고 각인된다. 그래서 '책은 생각의 도구'이다. 영상을 보거나 누군가 대화할 때도 그런 순간은 찾아올 수 있지만 나로서는,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책 읽기에 몰두할 때가 가장 잦다. 그래서 책은 내게 '가장 유효한 생각의 도구'가 되었다.



실제로 '읽는 뇌'와 '듣는 뇌'는 반응하는 뇌의 회로가 각각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유아들에게 읽기를(혹은 문자를) 먼저 가르치게 되면 '듣는 뇌'의 부위가 덜 발달하게 되고, 이것은 아이들의 뇌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북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7세 이하의 어린이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것이 불법일 정도이다. 물론 이미 성숙한 성인의 뇌라면 같은 문장을 읽든, 듣든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응하는 뇌의 회로가 다르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책 읽기와 책 듣기는 전혀 다른 자극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지 신경학자인 메리언 울프는 그의 책 <다시, 책으로>에서 '인간은 읽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에 반해 특별히 훈련을 하지 않아도 말을 듣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거기에 바로 읽기와 듣기의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만약 모든 이들이 책 읽기를 멈추고 책 듣기 독서를 하기 시작한다면... 신인류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도 브런치에 쓴 적이 있지만 말년의 보르헤스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하여 책을 읽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로 책을 듣는 보르헤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져 온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두려웠던 것은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며 어떻게 하나 싶은 우려였다. '읽기 욕망'이 그것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이것은 개인적인 기우일지도 모른다. 긍정적으로 보면 '독서'의 영역이 더 확장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대륙의 발견 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쪼록 나의 눈이 오래도록 온전하여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싶을 때 마음껏 읽을 수 있기를 깊이 소망한다. 또박또박 쓰여 있는 글자, 단어, 문장 그리고 행간을 읽으며 그 여백에 내 생각의 회로들을 채울 수 있기를. 노안이 더욱 느릿느릿 나무늘보 걸음으로 찾아오기를 바란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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