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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20. 2019

13. 책, 사치와 위로의 이름


아르헨티나의 문호 보르헤스는 말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하여 책을 읽었다고 한다. 서점 직원이기도 했던 그 피고용인은 열여섯 살부터 4년 동안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는데, 그는 이후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작가다. 어느 기자는 망구엘에 대하여 보르헤스로부터 '영혼의 세례'를 받았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문득 두려워졌던 이유는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공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되었든 기계의 소리가 되었든 눈으로 문자를 읽지 않고 그것을 듣는 행위를 과연 책을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특수 상황이기에 전자책으로도 책을 읽고는 있지만 종이책에서 전자책에 적응하는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해볼 때, 그저 듣는 것 만으로 '읽기 욕망'이 충족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갖게 된다.



다시 그 망구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에 따르면 보르헤스에게 책 읽기는 '수천 년 전에 시작해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인류의 대화'를 뜻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와의 대화, 타자와의 대화 외의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대화였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심지어 도서관을 '우주'라 비유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간을 자유자재로 편집해 사용하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아버지가 같은 유전적 특성을 물려받은 아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이 능력을 알게 되셨을 때 무엇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말한다.


-세상 모든 책을 다 읽었지. 모든 것을 다 읽었단다.




그것은 흔해빠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즉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영화 속 사람에게서 흔히 나올만한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마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그런 식의 대사는 나올 수 없었을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영화가 좋아졌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좋아졌다. 물론 전반적인 스토리는 대중들이 쉽게 공감할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시간 여행의 능력을 이용해 '세상 책을 모두 다 읽었다'는 대사는 이 영화의 심지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필자보다 10년 위의 한 선배는 자신이 대학 다닐 때는 돈이 생기면 무조건 책을 샀다고 한다. 철학서나 사회과학 서적, 소설 등등 닥치는 대로 엄청나게 사서 엄청나게 읽었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 지 15년 차가 되던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 지금은 돈이 생기면 옷을 사. 책으로 날렸던 돈이 너무 아까워.


당시에 나는 아무 말로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은 이렇게 이해된다. 책이나 옷이나 허영의 가치는 같다, 책이나 옷이나 사치스러움은 같다, 책이나 옷이나 과시욕의 무게는 같다, 책이나 옷이나 결국 상품이고 소비되는 것이며 한번 읽거나 입고 나면 버려지는 것이다.라고.



강창래 님의 <책의 정신>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책'은 정신적인 사치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고, 무척 비싼 물건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소유욕을 자극했다. 적의 책들은 훔치거나 빼앗아서 내 것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다 태워버려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책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인 물건이다라는 것. 정치의 영역을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먼저 개념 정리를 해야 이 의견에 동조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책이 탐욕과 소유욕을 자극하는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책에 대해서는 일종의 편견들을 꽤 쌓아두고 살고 있는 편인데, 예를 들자면 일단 그림이 주가 되는 책은 책이라 간주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그 하나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진첩이요, 만화로 이루어진 것은 만화일 뿐이고, 그림과 사진과 글이 적절히 변주되는 것은 잡지일 뿐이다. 그러니까 책은 꼭 텍스트로 이루어진 모음이어야 한다는 깊은 편견의 소유자이다.



어릴 적 책을 읽으며 매번 놀라웠던 것은 글자들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내 머릿속에서 엄청난 스케일의 영상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내가 잠시 책을 닫아두고 다른 일을 하다가 돌아와 다시 읽기 시작해도 흐트러지거나 와해되지 않았다. 책을 덮으면 하나의 조그만 종이의 묶음일 뿐인데 열고 그것을 읽는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걸고 그들과 함께 같은 곳을 걷거나 뛰고 있는 나를 체험한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흥분시켰다. 그리하여 그때 체험한 '텍스트 욕망'이 여전히 나를 책으로 이끈다.



예술에는 여러 장르가 있지만 그러한 이유에선지 모든 예술 장르들을 '텍스트'로 번역해 받아들여 버리곤 한다. 나에게 모든 작품들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그러니 도서관은 우주고, 세상 모든 것은 이야기고 책이라는 말이 내게는 펄떡거리는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생생하다. 책은 세상이었고, 세상은 해석하기 어려운 두껍고 난해한 책이었다. 텍스트로 만들어진 하나의 집에서 그 화자와, 등장하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뛰놀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고, 나는 지지 않고 그에 답했다. 책은 놀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은 책은 시간 속에서 잊힌다. 밤새워 읽으며 열광했던 문장들, 이런 문장들은 나로선 영원히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절망하던 그 감동들이 햇빛에 오래도록 놓아둔 물건들의 빚이 바래듯 기억에서 말끔하게 사라진다. 이럴 바엔 왜 읽는 건가, 똑같은 책을 정기적으로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재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책은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평범한 문장들 속에 숨어있던 작은 진주 알갱이를 발견하고는 부르르 마음을 떠는 그 순간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낯선 책을 펼친다.



이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그 책이 나의 메타인지의 영역 안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미세하게 '다른 나'가 아닐까. 그것을 읽는 동안과 읽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로 규정할 수 없는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문장들은 뇌의 주름 안에 자리를 잡고 안착한다. 어떤 것은 - 대부분의 것은 - 영원히 숨어버려 무덤에까지 갖고 갈 수도 있겠지만 어느 것은 때로 생명을 얻어 다른 무엇으로 발현되는 것 아니겠냐는 말이다.



때로 내가 펼친 하나의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내 영혼을 고양시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단지 플롯 만의 문제가 아닌 그 가공을 떠받치는 얼개들, 즉 문장들의 힘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그것을 쓰고 익명의 누군가는 그것을 읽는다. 나 역시 그 이름 없는 독자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제 아무리 많은 이들이 같은 문장을 읽는다 해도 내가 느끼는 떨림과 이 감동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고도로 진화된 자본주의 시대에도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순순히 지갑을 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과시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은 즐거움과 위로에 대한 욕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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