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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Dec 18. 2019

12. 자전거의 시간

모든 날들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로 나뉜다. 같은 맥락에서 비 오는 아침은 곧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아침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자전거는 '레저'가 아니다. 자전거는 그야말로 운송수단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렇게 자전거가 삶이 되어 버리면 비 오는 아침은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아침'이 된다. 매일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것은 때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날인지 아닌 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비 오는 날도 우비를 입은 채로, 혹은 한 손으로 우산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타는 이들도 있지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다. 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이 시려지는 순간 아, 겨울인가 싶은 자전거의 시간들.


자전거를 타게 된 것은 아이를 유치원에 태워 다니기 위해서였다. 스쿨버스가 있는 유치원이 흔하지 않아 약간 애매한 거리에 유치원이 있으면 이곳 엄마들은 대개 자전거로 등 하원을 시킨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앞자리에 태우고, 조금 크면 뒷자리에 아이를 태우고 달린다. 아이가 둘이면 앞 뒤로 태우고 달리고, 아이가 셋이면 앞 뒤로 태우고 나머지 하나는 아기띠로 등에 업고 달린다. 아이를 태울 수 있는 자전거를 '마마 차리'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전동으로 기동 할 수 있어서 언덕길도 가뿐히 올라갈 수 있다. 엄마들은 마마 차리를, 경찰들은 경찰용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경찰들에게 차나 오토바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훨씬 눈에 많이 띈다. 야쿠르트 아줌마도 자전거로 야쿠르트를 배달한다. 여기저기 자전거 판매와 수리를 겸한 점포가 300미터 간격 정도로 포진해 있다.


자동차 운전면허가 없는 나는 처음으로 자전거에 올라 타 페달을 밟는 순간, '탈 것'에 몸을 싣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동을 한다는 사실에 들떴었다. 조금 걸어도 지치는 저질체력의 소유자로서, 자전거에 오르면 나의 발이 두 개의 바퀴로 트랜스포밍을 한다.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기분이 그런 것일까, 속력이 선사하는 기쁨에 들뜨게 된다.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갖추어진 맑은 날,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리면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팔에 감기는 햇살 한 줄기에도 바르르 떨리는 듯한 충만함을 느낀다.


19세기 초에 처음 발명된 자전거는 '금녀의 영역'이었다 한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자전거를 탈 때마다 19세기의 여성들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긴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몰아 달리는 19세기의 여성을. 내가 때로 바지를 입을 때마다 페미니즘을 생각하고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나오며 페미니즘을 생각하듯 말이다.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흐르는 공기 안에서 호흡하듯 지금에 이르러는 당연한 일들을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누릴 수 없던 사회라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무엇인지! 여전히 많은 19세기 그녀들의 자전거처럼 2020년을 앞둔 현재에도 풀려야 할 수많은 억울함들이 쌓여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매일의 시간이, 매일의 기쁨과 시대의 부조리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자전거와 함께 쌓여간다. 자전거의 시간은 앞으로 내딛으면 페달을 밟은 만큼만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당연하겠지만 발을 멈추면 자전거도 멈춘다. 달리는 자전거는 현재다. 달려갈 거리는 미래이고, 지나온 궤적은 과거다. 또 이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자전거를 내닫는 내 관절들의 소리와 등 뒤로 땀이 흘러내리는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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