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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Mar 25. 2021

리얼리티의 일부

사유의 정원에서

이케아 재팬에서는 지난해 8월 새로운 광고 모델을 선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Imma, 같은 해 1월 잡지 모델로 데뷔한 그녀는 인기도 상당하여 인스타그램 팔로워 25만 명의 인플루언서가 되었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는 그녀의 일상의 사진들과 소소한 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녀가 기존 연예인들과 다른 점은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즉 VR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VR 모델이라는 것을 밝히지는 않았기에 반향도 남달랐던 듯하다.






그녀는 너무도 리얼하다.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지만 그녀는 그저 '허상'이다. 말하자면 그림자가 없다. 아니, 실체가 없이 그림자만 있는 셈이려나. 물리적으로는 이 지구에도 우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피부 안쪽에는 혈액이 흐르지 않고 두피 안쪽에 뇌는 없다. 게다가 살이 찌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는다. 페이크가 너무도 리얼할 때 우리는 감탄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고 말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을 보면 진짜 같다고 감탄하듯이. 그렇게 Imma의 이미지는 너무도 리얼하여 감탄하게 된다.


​​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배우 정우성이 출연하여 '잘생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생김이란 것은 결국 외피일 뿐이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생긴 사람이 외피의 가치에 대한 말을 하니 설득력이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도 늙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늙음이 죄는 아니다) 비록 그가 외피보다 내면의 가치가 더 큰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세상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다. 하루키식으로 말하자면 중심이 텅 빈 도넛화,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소외, 이것들의 끝장판이 이미 시작되었다.




과일이나 채소를 올바르게 섭취하는 방법은 껍질 채 먹는 것이라고 한다. 껍질 속에 영양분이 가득 담겨있고 껍질을 포함한 본체의 모든 것을 전부 먹어야 균형 잡힌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단다. 즉 껍질까지 전부 먹는 것이 트렌드이다. 건강을 주제로 한 이 기사는 '세상은 왜 점점 껍데기와 본질의 가치가 뒤바뀌고 있을까'를 고민하던 나에게 약간의 충격을 주었다. 그러니까 껍데기도 본질을 구성하는 일부이며 껍데기와 알맹이가 합체한 상태만이 최선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간 외피, 즉 껍데기를 의식적으로 하대하고 있었지만 그건 잘못된 방식이었던 것이다. 외피와 내피 어느 한쪽으로 비중이 쏠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 외피와 내피 모두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애니메이션 <월 E>에서 청소 로봇으로 태어난 월 E가 쓰레기 더미에서 반지가 들어있는 케이스를 발견하고는, 반짝반짝하는 반지는 휙 던져 버리고 케이스만 소중하게 주머니에 집어넣던 장면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한다. 본질은 상자 안쪽에 담겨 있는데 본질은 버리고 포장지에 열광하는 월 E는 친근하고 귀엽다.




나의 딸은 오래전부터 내 향수를 노리고 있다. 정확히는 향수가 아닌 향수병을 탐낸다. 어서 빨리 향수를 다 쓰고 자신에게 향수병을 넘기란다. 아이의 모습에 월 E가 겹쳐진다. 요즘 같아선 향수의 본질이 내용물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향수 케이스를 갖고 싶어 향수를 구매하는 사람도 구매자의 50퍼센트 정도 될지도 모른다. 배철수를 흉내 내던 배칠수가 라디오에서 더 많이 나오고 친근해진 것처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이처럼 깊숙이 다가오는 것도 처음이다. 그러나 동굴 안 죄수에게 비치던 그 그림자들 혹은 허상들은 이미 생명을 갖기 시작했다. 아니, 생명을 가진 것처럼 활보하기 시작했다. 과일을 껍질 째 먹어야 영양을 균등하게 섭취하는 것처럼 그림자가 없으면 실체도 없으며 향수 케이스가 없으면 향수를 담을 수 없다. 허상이, 껍질이, 이미지가 '본질'에 영향을 미치고 본질을 들쑤신다면, 이제는 드디어 허상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허상은 이미 '허상'이 아니다. 적어도 리얼리티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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