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정원에서
이케아 재팬에서는 지난해 8월 새로운 광고 모델을 선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Imma, 같은 해 1월 잡지 모델로 데뷔한 그녀는 인기도 상당하여 인스타그램 팔로워 25만 명의 인플루언서가 되었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는 그녀의 일상의 사진들과 소소한 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녀가 기존 연예인들과 다른 점은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즉 VR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VR 모델이라는 것을 밝히지는 않았기에 반향도 남달랐던 듯하다.
그녀는 너무도 리얼하다.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지만 그녀는 그저 '허상'이다. 말하자면 그림자가 없다. 아니, 실체가 없이 그림자만 있는 셈이려나. 물리적으로는 이 지구에도 우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피부 안쪽에는 혈액이 흐르지 않고 두피 안쪽에 뇌는 없다. 게다가 살이 찌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는다. 페이크가 너무도 리얼할 때 우리는 감탄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고 말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그림을 보면 진짜 같다고 감탄하듯이. 그렇게 Imma의 이미지는 너무도 리얼하여 감탄하게 된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배우 정우성이 출연하여 '잘생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생김이란 것은 결국 외피일 뿐이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생긴 사람이 외피의 가치에 대한 말을 하니 설득력이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도 늙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늙음이 죄는 아니다) 비록 그가 외피보다 내면의 가치가 더 큰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세상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다. 하루키식으로 말하자면 중심이 텅 빈 도넛화,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소외, 이것들의 끝장판이 이미 시작되었다.
과일이나 채소를 올바르게 섭취하는 방법은 껍질 채 먹는 것이라고 한다. 껍질 속에 영양분이 가득 담겨있고 껍질을 포함한 본체의 모든 것을 전부 먹어야 균형 잡힌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단다. 즉 껍질까지 전부 먹는 것이 트렌드이다. 건강을 주제로 한 이 기사는 '세상은 왜 점점 껍데기와 본질의 가치가 뒤바뀌고 있을까'를 고민하던 나에게 약간의 충격을 주었다. 그러니까 껍데기도 본질을 구성하는 일부이며 껍데기와 알맹이가 합체한 상태만이 최선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간 외피, 즉 껍데기를 의식적으로 하대하고 있었지만 그건 잘못된 방식이었던 것이다. 외피와 내피 어느 한쪽으로 비중이 쏠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 외피와 내피 모두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애니메이션 <월 E>에서 청소 로봇으로 태어난 월 E가 쓰레기 더미에서 반지가 들어있는 케이스를 발견하고는, 반짝반짝하는 반지는 휙 던져 버리고 케이스만 소중하게 주머니에 집어넣던 장면은 우리를 웃음 짓게 한다. 본질은 상자 안쪽에 담겨 있는데 본질은 버리고 포장지에 열광하는 월 E는 친근하고 귀엽다.
나의 딸은 오래전부터 내 향수를 노리고 있다. 정확히는 향수가 아닌 향수병을 탐낸다. 어서 빨리 향수를 다 쓰고 자신에게 향수병을 넘기란다. 아이의 모습에 월 E가 겹쳐진다. 요즘 같아선 향수의 본질이 내용물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향수 케이스를 갖고 싶어 향수를 구매하는 사람도 구매자의 50퍼센트 정도 될지도 모른다. 배철수를 흉내 내던 배칠수가 라디오에서 더 많이 나오고 친근해진 것처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처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이처럼 깊숙이 다가오는 것도 처음이다. 그러나 동굴 안 죄수에게 비치던 그 그림자들 혹은 허상들은 이미 생명을 갖기 시작했다. 아니, 생명을 가진 것처럼 활보하기 시작했다. 과일을 껍질 째 먹어야 영양을 균등하게 섭취하는 것처럼 그림자가 없으면 실체도 없으며 향수 케이스가 없으면 향수를 담을 수 없다. 허상이, 껍질이, 이미지가 '본질'에 영향을 미치고 본질을 들쑤신다면, 이제는 드디어 허상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허상은 이미 '허상'이 아니다. 적어도 리얼리티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