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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아나 Sep 19. 2016

상처받더라도, 자존감을 지켜라

상처받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그렇게 잘못된 어른들은 가르쳐왔다.


분명 실패나 시련도 인생에는 필요하지만 모든 상처가 어른이 되는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어른만 양성되기 쉽다.


또한 모든 젊은이가 상처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상처는 큰 흉터만 남길 뿐, 자양분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육체적 충격이나 사고가 닥치면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싼다.

다른 부위는 다소 더 다치더라도 머리만은 가장 나중에 다쳐야 한다는 보호본능이다.


내면의 충격과 사고는 어떤가?

우리는 내면에 시련과 상처가 다가오면 무의식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방어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내 자존심이다. 

놀림거리가 되더라도,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남들에게 짓밟히고, 무시당하더라도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은 방어본능이 내면에도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상처받고, 모멸당하고, 시련을 입는데 어떻게 자존심이 멀쩡할 수 있겠는가?

마치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나 아직 멀쩡해 라고 외치는 사고현장의 생존자처럼 나의 정신적 상처와 내상 역시도 온갖 곤욕을 치르면서도, 나 상처받지 않았어! 난 잠시 헛딧었을 뿐이야, 난 멀쩡해!! 라고 자기최면을 걸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면은 잠시뿐, 그것은 고통의 지연이지 고통의 면책은 되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올바르게 상처받는 법은 없을까?

왜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상처와 가시밭길에 내동치기만 할 뿐, 올바로 상처받는 법은 가르치지 않을 것일까?


'천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꽃의 비유에서 따온 책만 찍어서 부지런히 팔면 어른의 의무는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다른 젊은이들에게 나 역시 그런 어른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처받는 법


가장 큰 실수는 아애 상처를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선 아주 현명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상처를 무시하고 상처를 외면하는 것은 결국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오히려 더 자존감이 무너져 내린다.


나는 상처받지 않아! 난 이정도로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 않아!!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시킨다.


그러나 이미 상처는 받았고, 실제로는 매우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런 상처를 외면하는 장치는 앞서 언급한대로, 육체적 충격이 예상되면 누구나 머리를 감싸쥐는 것과 동일한 보호본능이다.

그러나 이 보호본능은 아주 어린 아이에게만 유효하다.

어른은 이미 자신이 약하다는 끔찍한 사실을 모르는 척할만큼 뻔뻔하지 못하다.

자기 무의식은 이미 알아차리고 있는 상처를 애써 모르는 척할 수록 상처는 오히려 안으로 곪아간다.

그리하여 자존감은 어느새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모든 내면의 시련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아래의 방법을 때론 적용해보자.



1. 상처를 인정한다.


직장상사에게 혼이 난다. '너 이러고 월급받니? 너가 이러라고 이 자리에 뽑아논 줄 알아? 이따위로 할거면 내일부터 사표 쓸 준비해!'


이런 말을 듣고도 '난 나를 사랑해~ 난 나를 존중해~'

라는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내가 싫어지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남탓으로 자신의 상처를 전가시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럴 때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올바른 대처법은 "난 상처 받지 않았어~!" 가 아니다.

왜냐면 그 다음 대사는 햄릿보다 더 뻔하기 때문이다.

"내 책임이 아니야! OO의 잘못을 내가 덤터기 쓴거지. XX 나쁜놈...."


남의 탓이나 환경의 책임으로 미루게 되면 분명 상처는 덜어지고, 자존심도 지킬 수 있는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자존감은 이정도로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점점 자존감은 낮아지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쓰리지만, 내가 상처받았음을 인정하자.


'그래 난 직장에서 큰 질책을 당했어. 가슴이 아파! 속이 쓰려! 고통스러워!'


그리고 그 다음 대사는 몹시나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남에게 하찮게 여겨지지 않도록 노력할 의무와 가치가 있다. 그점을 나에게 잘 주시시켜보자. 

나는 소중한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런 일을 두번 겪지 않을 방안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설사 이런 사태가 남 탓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때부터 내가 같은 이유로 상처받더라도, 음~ A의 방법이 실패했군. 다른 방법(Plan B)을 찾아봐야 겠어!

라는 식으로 나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처받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Plan B마저 실패해서 C에서 Q까지 가도 좋다. Z까지 가도 좋다. 마침내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어! 가 되어도 좋다. 실패나 맹점을 인정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반면 반복되는 문제를 일회성 면피로 외면하게 되면 나의 자존심과 자격지심은 지켜질 지언정 자존감은 회복하기 힘든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 몰랑~!'의 상태가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누구도 구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자기 주체성을 상실하고, 남탓만 일삼게 된다. 그런 상사, 그런 리더, 그런 아내 또는 남편과 함께 하고 싶은 팔로워(동반자/동료)는 없다. 비난은 가장 약한 자의 처방전일 뿐이다.



2. 모든 실패에는 의미가 있다.


어느 성공학 책에서

'성공은 하나를 가르치지만 실패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는 격언을 본적이 있다. 실제로 의미없는 실패는 없다. 단지 우리가 그 의미를 무시하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더라도, 어쩌면 우리가 잘못알 고 있었던 이성관에 대해 일깨워주는 계기로 작용할 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미 나를 버린 애인과 좋은 만남을 이어갔더라면 빠질 수 있었던 더 큰 불행으로부터 실연은 나를 구해준 셈이 된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 암시나 자기방어의 의미가 아니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인과관계와 내 안의 착오를 실패는 발견하고 각성할 기회를 준다. 에디슨은 9천9백번 실패하고 만번째에 전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나는 9천9백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구를 만들지 못하는 방법 9천9백가지를 발명한 것입니다.'라고 후일담을 남겼다. 물론 전구를 만드는 방법 1가지도 같이 발명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그의 업적이다.


테슬라는 에디슨을 두고 '짚단 속에 떨어진 바늘을 찾아 짚단을 일일히 헤쳐보는 사람이다.'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이는 에디슨의 우직함을 비꼰 뜻도 일부 담겨 있지만, 훗날 더 이름을 알린 사람은 천재 테슬라보다는 노력하고 실패하는 발명왕 에디슨이다.


내가 훌륭하지 못한 결과를 거두는 것은 내 일의 결과이지 내 자신의 우열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바보같은 짓을 해도 내 일의 결과가 나빴을 뿐이지 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내일은 다른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존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거야'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 될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3. 자기를 믿는 다는 것


나는 비틀거리는 사람이지만 똑바로 가고 있습니다.


실패를 수도 없이 경험했던 링컨이 스스로에게 한말이다. 

내가 비틀거려도 올바른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면 남보다 늦게 도착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조금 늦더라도 올바른 곳에 도착하는게 낫다.

잘못된 곳에 먼저 도착한다고 해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보다 열가지중에 아홉가지가 부족하더라도, 내가 가진 마지막 한가지 믿음까지 열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불빛을 향해 똑바로 걷는 사람이다. 조금 비틀러려도 언젠가 저 불빛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걷기 위해선 한 발을 떼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일직선으로만 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조금씩은 누구나 좌로 우로 흔들리며 걷기 마련이다.


올바른 방향을 향해가고 있다는 믿음은 내면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된다.



시련을 받더라도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을 지켜보자. 언제나 모든 행불행은 내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믿자. 멀지 않은 미래에 남보다 조금씩 앞서나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분간 강남에서 작업합니다. 좋은 분들 많이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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