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롤리타」에 대해 얘기하다가 첫문장만으로 너무 아름다운 소설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틈날 때 마다 한 문장씩 꺼내어 보는 것도 쏠쏠한 묘미가 있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뭄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그뭄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조정래 <태백산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아침에 아내의 임종을 간리하던 당직 수련의가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하던 순간, 터질 듯한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그 무거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영안실 전체가 조용했다. 오줌이 빠져나간 방광이 빈 들판처럼 느껴졌다.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아내의 빈소를 혼자서 지키던 새벽에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는 일은 참혹했습니다.
그 젖은 분홍빛 어둠 속으로 넘겨지는 밥알과 고등어 토막과 무김치 쪽의 여정을 떠올리면서, 저의 마음은 캄캄히 어두워졌습니다.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그토록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요.
김훈 <화장/ 칼의 노래>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르 미끌어져 내리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바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애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치며 세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
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
다. 그녀 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던가? 있었지. 그래 있었지. 사실은 어느 여름날 내가 어느 어린
소녀애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롤리타는 없었을 것이다. 바닷가 어느 왕자의 궁에서. 아, 언제?
롤리타가 태어나기 전, 그해 여름 내 나이때. 여러분, 멋진 산문체를 얻으려면 언제나 살인자에게 오시오.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증거서류 제 1호는 단순하고 날개달린 고귀한 대천사들이 무엇을 시기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이 번민에 뒤엉킨 걸 좀 보십시오. "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통 받았다 :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 모르겠다. 양로원
은 알제이에서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두 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 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밤새움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사장에게
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니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
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할 일이었
다. 하지만 아마도 모레, 내가 상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조문을 할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다름이 없는 듯한 상태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인된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
"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었는데, 나는 아직
도 그 충고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
라.’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부자(父子)는 언제나 신기할 정도로 말없이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고, 나의 아버지의 말씀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에 판단을 유보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자주 나에게 접근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사람들에게 적잖이 시달려야만
했다. "
" 아이들이 백보드를 달아놓은 전봇대 주위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달리고, 환호성을 오른다.
운동화가 골목길에 완만하게 깔린 자갈을 밟거나 비빌 때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이 솟아올
라 전깃줄 위 푸른 3월의 축축한 대기 속으로 사라져간다. 신사복 차림의 토끼 앵스트럼이 골
목길에 다가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키가 6피트 3인치나 되는 26세의 사나이다.
키도 매우 클뿐더러 토끼를 닮은 데라곤 별로 없지만, 넓적하고 하얀 얼굴, 해맑은 푸른 눈동자,
작은 코 밑의 입술을 떨면서 피우던 담배를 무는 모습을 보면 그런 별명이 붙을 만도 하다는 생
각이 든다. 그 별명은 어렸을 때 붙여진 것이다. 그는 그곳에 멈춰 서서 생각한다. 바야흐로 새
세대인 아이들이 나를 밀어내는군. "
"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려니까 교장선생님께서 어떤 평복 차림의 신입생과 큰 책
상을 든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셨다. 졸고있던 아이들이 깨어났고, 각자 정신없이 공부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자리에 앉으라고 손
짓을 하셨다. 그리고 자습교사 쪽으로 돌아서서 <로제씨>하고 나직이 말씀하셨다.
- 여기 이 학생을 좀 부탁해요. 중등반 2학년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학업과 품행을 봐서 양호
하면 제 나이에 맞는 상급반으로 올려주지요. "
" 늦은 저녁에야 K는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조금도 보이
지 않을뿐더러 성은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큰 성이 있는 것을 알리는 희미한 등불
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오랫동안 큰 길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희멀건 허공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잠자리를 구하러 갔다. 여관집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자지 않고 있었다. 빈방은
없었으나, 주인은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당황한 나머지 K를 객실에 있는 짚을 넣은 포단 위
에 재우려고 했다. K는 이 말을 수락했다. 농부 몇 사람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나 아무와도
지껄이고 싶지 않아서 지붕 및 방에서 몸소 짚을 넣은 포단을 가져다가 난로 가까이 깔고 누웠
다. 그곳은 따뜻했고, 농부들은 조용했다. 그는 피곤한 눈초리로 좀 살펴보다가 어느덧 잠들어
버렸다. 그러나 잠든 지 얼마 안되어서 벌써 그를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도회지 사람과 같은 몸
차림, 배우처럼 보이는 용모, 가느다란 점, 짙고 검은 눈썹의 젊은이가 주인과 함께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농부들도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는데 몇 사람은 그 모양을 더 잘 보고 들을 양으
로 의자를 돌리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K의 잠을 깨운 것을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스스
로 성의 집사의 아들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끄집어내었다.
- 이 마을은 성의 소유지입니다. 여기서 살거나 머무는 이는 성안에서 거주하거나 숙박하는 거
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성주이신 백작님의 허가 없이는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허가장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보여주신 일조차 없습니다. "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
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 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
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놓
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
"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
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
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
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
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덞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
도 그렇게 눈부신 법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
"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다. 오블 론스키의 집안에서는 만사가 뒤죽박죽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집에 있었던 프랑스 여자 가정교사와 관계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자, 남편에게 그와 한 집에서 살 수 없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가 벌써 사흘이나 계속되고 있었으니, 당사자인 내외는 물론이고, 온가족, 심지어 하인들까지도 매우 괴로운 모양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信號所)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島村) 앞에 있
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 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치듯이, “역장니임, 역장니임!”하고 소리쳤다.
등잔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사나이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싸매고는 귀에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으로 내리덮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싶어 시마무라가 창밖을 내다보니, 철도 관
사처럼 보이는 바라크들이 산기슭에 으스스하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빛은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어둠 속에 삼켜져 있었다.
나는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하며 똥통 속을 들여다 보았다.
어두운 똥통 속으로 어디선가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고 눈물이 어려 어롱어롱 펴져 보이는 눈길에 부옇게 끓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가 빛속에서 소리치며 일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오정인 <중국인의 거리/ 유년의 뜰>
그는 문을 안으로 걸어잠그고 자리에 들어 나애의 튭상스러운 허리를 꼭 껴안고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땅 껍질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사이사이로, 징소리가 쉬지 않고 큰 황소 울음처럼 사납고도 구슬프게 들려왔기 때문에 잠시도 눈을 붙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바람 소리와도 같은 그 징소리는 바로 뒤란의 아카시아 숲께에서 가깝게 들린 것 같다가도 다시 댐 쪽으로 아슴프레 멀어져 가곤 했다.
"바람소린지, 징소린지."
문순태 <징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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