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리안은 회사로부터 전철로 세 정거장이나 더 멀어진 혜화동 외곽 동네로 이사를 해야 했다. 집주인이 주변 시세의 압력에 따라, 마치 당연한 듯 전세금을 인상한 탓이었다. 새로운 동네의 낯선 공기가 아직 채 익숙해지기도 전, 리안은 집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오랜만에 직장 동기들 모임에 나갔다.
1차 회식이 끝나고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2차는 리안의 새집에서’를 외치며 리안을 앞장 세웠다.
“친구들, 잠깐만! 다음에 해! 나 아직 짐 정리도 제대로 못 했단 말이야!”
리안은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지만, 친구들은 이미 '파티 감행' 모드였다. 가현은 리안의 팔짱을 꽉 끼며 웃었다.
“짐 정리가 뭐야, 짐 자체가 분위기지! 우리가 정리해 줄게, 괜찮아!” 요즘 집들이는 말이야, 실물 영접보다 온라인 라이브가 먼저라고! 우리 리안, k문고에서 야근만 하는 줄 알았더니 여덟 평짜리지만 대출 영혼까지 끌어모은 힙한 원룸으로 이사했다며? 내돈내산 뉴 하우스 언박싱 릴스부터 찍어야지!”
가현에 이어 수경이 한술 더 뜨며 휴대폰을 꺼내 들어 리안을 부추겼다.
“맞아! 이 시대의 집들이란, 인스타 스토리 각이 나와야 완성되는 거야. 널브러진 짐들도 솔직한 워크홀릭의 삶 컨셉으로 하면 돼. 리안, 너는 느림의 철학 때문에 집 정리도 굼뜬 거야?”
‘이게 지금 느림의 문제가 아니잖아!’ 리안은 속으로 버럭 소리쳤지만, 입 밖으로는 차마 내지 못했다. 자신이 목숨처럼 지켜온 가치가 친구들의 농담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리안의 원룸은 사생활의 안전지대를 넘어, 자신의 가치관이 시험대에 오르는 공개 구역이 될 참이었다. 수경은 리안의 복잡한 심경은 아랑곳없이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안줏거리를 쓸어 담았다. 리안은 머릿속으로 여덟 평짜리 원룸의 지도를 빠르게 그렸다. 현관 앞을 막고 있는 이삿짐 박스 더미, 주방에 쌓인 설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방 한가운데를 산처럼 차지하고 있는 정리되지 않은 빨랫감과 널브러진 옷가지들까지.
“안 돼, 얘들아! 지금 진짜 상태가 아니야!”
리안은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이미 수경이 승리의 깃발처럼 맥주 봉투를 흔들며 리안의 등을 밀고 있었다. 리안은 결국 포기한 채, 수습 불가능한 자신의 새집으로 친구들을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끼익. 리안이 원룸의 현관문을 열자마자, 친구들의 환호성은 미세한 탄식으로 바뀌었다. 현관부터 냉장고 앞까지, 온갖 이삿짐 박스가 산맥처럼 솟아 리안의 여덟 평짜리 삶을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와, 리안! 이건 솔직한 워크홀릭이 아니라, 고독한 짐꾼의 은신처 컨셉인데?”
수경은 들고 있던 맥주 봉투를 간신히 바닥에 내려놓으며 농담했다. 가현은 곧바로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방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찍기 시작했다.
“자, 릴스 시작! 여러분, 여기가 k문고 큐레이터, 리안의 영혼이 깃든 뉴 하우스입니다! 이 짐들은 사유와 철학을 담은 책만큼 소중한 리안의 분신들이라, AI 청소기가 와도 손대지 못할 휴먼 에러의 영역이에요!”
리안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야, 빨리 꺼! 그만해!”
“왜! 이게 리얼리티지!”
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 쌓여있는 빨랫감 산을 클로즈업했다. 수경은 구겨진 옷들을 피해 겨우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더니, 맥주 캔을 따며 말했다.
“아니, 진짜 이 정도면 회사에서 살았던 거 아니냐? 리안, 너 진짜 이사 와서 이불 펴고 잠만 잤지? 야근 좀 줄여라.”
리안은 수경이 건넨 차가운 맥주 캔을 땄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솟아오르자, 리안은 짐 산을 등진 채 맥주를 깊게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하루 종일 머리를 짓누르던 피로와 꿉꿉한 더위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리안은 그제야 억지로 짓누르고 있던 긴장감을 놓았다. 얼굴에 미지근한 미소가 피어났다.
취기가 오른 친구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커져 있었다. 그들은 이 밤이 각자의 분노를 토해내는 해우소가 되기를 바라는 듯했다.
“사람들이 서점 일 되게 폼 나는 줄 아는데, 책 냄새 맡으면서 우아하게 커피 마시는 줄 알겠지만, 진짜 현실은 달라. 하루 종일 온몸의 체중을 두 발로 밀어 넣고 버텨야 하는 참 고단한 노동이거든. 책 정리한다고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났다만 수백 번이지. 피로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인다고.”
리안은 꾹 눌러왔던 고단하고 피로한 일상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을 꺼냈다.
“결국 나 하지정맥류까지 걸렸잖아. 이젠 치마도 못 입어.”
리안은 술기운을 빌려 자신의 종아리를 친구들에게 드러내 보이며 하소연을 했다. 푸르스름한 핏줄이 미세하게 얽힌 종아리를 본 친구들은 일제히 이구동성으로 탄식을 쏟아냈다.
“어떡해 정말!”
“세상에나……”
k문고에서 함께 일했던 동기, 이제는 프랜차이즈 직원인 미혜가 긴 한숨을 쉬며 리안의 종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매장은 진상 고객들만 없으면 그래도 할 만한데. 곰팡이가 낀 텀블러를 가지고 와서 '이거 좀 닦아줘요' 하지 않나, 빈 페트병 여러 개를 가지고 와선 글쎄, 종류별로 탄산음료를 리필까지 해 간다니까.”
미혜는 곰팡이 냄새를 맡는 듯 코를 찡그렸다.
“야, 그건 귀여운 장난 수준이지.”
또 한 명의 k문고 동기, 혜나. 그녀는 서점을 떠나 헬스 푸드 업종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 얘기 들어보면 아마 기절할걸. 얼마 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손님이었지, 아마. 마스크도 쓰지 않고 파운데이션, 팩트, 쿠션, 프라이머...... 하여튼 베이스 메이크업 화장품 한 무더기를 골라 오더니 자기가 유명 인플루언서라면서 30만 원어치 가격을 반값에 해 달라는 거야. 나는 정중하게 규정상 그럴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자기가 올린 포스팅 하나에 가게 매출이 좌우되는 거 모르냐며 언성을 높이더라고!”
혜나는 그때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니까 갑자기 고래고래 쌍욕을 하며 화장품들을 바닥에 쏟아붓고는, 가판대 앞에 진열된 일회용 마스크 팩들을 막 집어서 나한테 집어던지더라니까!”
리안은 널브러진 짐과 맥주 캔들 사이에서 친구들의 살기 어린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느덧 시계는 새벽 두 시를 향하고 있었다.
“슬슬 가자, 얘들아. 내일 출근해야지.”
가현이 맥주 캔을 정리하며 말했다. 수경과 혜나가 리안의 새집이 온라인 각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남은 캔들을 모아 분리수거함까지 들고나가는 성의를 보였다. 리안은 현관까지 친구들을 배웅했고, 문이 닫히자 비로소 좁은 원룸에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리안은 방 안 벽에 기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친구들의 하소연을 돌이켜 생각했다. 리안의 서점에는 곰팡이 낀 텀블러를 내밀거나, 마스크 없이 쌍욕을 하며 화장품을 던지는 고객은 없었다. 리안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품격을, 그들이 가진 조용하고 지적인 관용을 떠올렸다.
친구들의 말들이 이상하게도 리안에게 위로가 되었다.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발바닥과 종아리의 통증을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