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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09화

느림의 승부수

by 오프리

리안이 k문고에서 거북이들을 키울 수 있게 된 것은 리안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독서 인구를 어떻게든 부양시키기 위해, 회사는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백 년 서점’이라는 주제로 사내 공모전을 열었다. 시대 흐름은 디지털 전환과 효율성 증대를 요구했지만, 리안은 오히려 느림의 가치를 끌어안고 서점의 본질을 회복할 방법을 찾았다.


리안은 매일같이 서가 사이를 거닐며 고심했다. 리안의 시선은 책 진열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듯 들어선 고객들이 서가 앞에서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얼마 만에 책을 내려놓고 돌아서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사람들은 책 자체를 탐독하기보다는, 손쉽게 정리된 표지의 띠지 문구나 화려한 마케팅 카피에만 찰나의 시선을 던지고 재빨리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책 본문이 아닌, 요란한 광고 문구와 수상 이력만으로 과연 그 책의 가치가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 리안의 눈에는,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속도에 쫓기는 듯했다.

리안은 서점이 단순한 활자를 파는 곳이 아니라, 고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파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회사를 대표할 ‘백 년 서점’이라는 주제에서 시간의 웅장함과 느림의 상징을 찾던 어느 날이었다.


리안은 잠시 회사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며 머리 매무새를 다듬었다. 여섯 살 무렵 아버지가 사주셨던 거북 핀은 오래전에 낡아 사라졌지만, 서점 큐레이터가 된 리안은 그 상징만은 놓지 않았다. 리안은 좀 더 단정하고 직장 생활의 품위에 걸맞은 새 핀을 샀다. 아버지가 사준 핀처럼 깊은 바다색을 띠고 있었지만, 매끈하지 않던 아크릴 대신 짙은 청색의 단단한 에폭시 바탕에 금속 테두리 장식이 들어간 거북 핀이었다. 리안은 긴 머리카락을 묶을 때마다 그 묵직한 거북 핀을 사용했다. 리안에게 그 핀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세상의 속도에 맞서 자신만의 호흡으로 쌓아 올린 철학을 지켜내겠다는 단단한 결의 그 자체였다.


리안이 거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머리핀을 정돈하는 순간, 거북이 등껍질에 반사된 조명이 리안의 눈에 섬광처럼 들어왔다. 그 잠깐의 순간,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제주 색달리 해변에서의 기억 한 조각이 불현듯 솟아올랐다. 리안은 그 기억에서 결정적인 영감을 얻었다. 리안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느림의 상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책을 고르는 행위 자체를 느리고 안정된 리듬으로 바꾸는 물리적인 장치. 거북이 수족관은 느림과 생명이라는 상징을 통해 고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최소한의 안식처이자 정신적인 닻이었다.

영감이 마침내 고민의 안개를 걷어내자, 리안은 새벽잠을 줄여가며 자신의 철학을 담아 제안서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예상 수익이나 디지털 혁신 대신, 서점 내에 멈춤과 사유의 공간을 창조하여 독서의 본질적 가치를 회복한다는 철학이었다. 제안서를 완성하는 순간, 리안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AI 시대에 웬 거북이인가’ 하는 내부의 냉소적인 시선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했다. 느림의 가치는 속도와 효율을 외치는 회사의 목표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떨리지만 후회는 없다.’ 리안은 그 ‘떨림’ 속에서도 굳건한 확신을 찾아내며 조용하고도 단단한 결의를 다졌다. 다음 날 아침, 리안은 출근하여 미처 식히지 못한 밤샘의 열기가 남은 제안서 파일을 열었다. 응모 버튼을 누르기 직전, 리안은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단단히 고정한 거북 모양의 머리핀을 매만졌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제안서를 전송했다.








일주일 후, 리안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통보받았다. 거북 수족관이라는 지극히 비효율적인 아이디어가 내부 심사위원들의 의구심을 뚫고 최종 발표 후보자 명단에 오른 것이다. 리안은 활자의 바닷속에서 느림의 가치를 외친 자신의 목소리가 완전히 묵살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조용한 전율을 느꼈다. 이제 리안은 숫자의 논리를 넘어 철학의 힘을 증명해야 하는 마지막 무대에 서게 되었다.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동료 가현이 화장실에서 나오던 리안에게 득달같이 달려왔다. 마치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비행기처럼, 가현은 리안에게 직진했다.


“리안, 미쳤어! 거북 수족관 아이디어가 진짜 올라갔어! 축하해, 네가 해냈어!


가현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리안의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리안의 목이 덜렁거릴 정도였다. 리안은 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으나, 가현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마치 이 기쁨의 순간을 혼자만 만끽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웃음을 참아냈다. 주변 직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꽂혔지만, 가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솔직히 다들 ‘아니, 서점에 왜 동물을?’이라고 수군대긴 하더라. 책 읽고 사색하는 공간에, 시간을 초월해 느릿하게 움직이는 거북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그림이라서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지. 다들 아이디어는 신선하지만, 비용이나 관리 문제 때문에 본선 통과는 힘들 것이라고 했어.


“나도 반신반의해.”


리안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아이디어를 응모한 지 며칠 동안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혹시라도 ‘별난 아이디어’로 취급되어 사장될까 봐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갈수록 줄어드는 독서 인구를 부양시키기 위한’ 사내 공모전의 취지를 생각할 때,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느림의 미학이라 믿었다. 인류가 겪고 있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책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통찰하는 유용한 존재다. 리안은 거북의 긴 생명력처럼 책 또한 인류와 오래도록 생존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북 수족관’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제 1차 고비는 넘었지만, 그들의 우려대로 예산과 행정적 문제를 설득하는 것이 리안 앞에 놓인 진짜 싸움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제안서가 얼마나 독특했는지 알아? AI 시대에 유일하게 아날로그적이고, 그래서 오히려 신선한 휴식을 제시했잖아. 심사위원들이 네 발표 자료를 두고 ‘호기로웠다’고 평했다는 거 몰라? 진짜 너다운 아이디어였어.


가현은 리안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눈을 빛내며 리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축하와 더불어 통제할 수 없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근데, 리안. 네 아이디어에 거북이만 들어간다고 들었어. ‘거북 수족관’이라는 그 이름처럼, 오직 거북이만으로 승부를 볼 생각인 거야? 넌 개 말고는 특별히 키워본 적도 없잖아. 너 혹시, 이 아이디어를 어디서 영감 받은 거야?


가현은 리안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리안에게 더 바짝 다가섰다. 리안의 코끝에 가현이 방금 사용한 복숭아 향 핸드크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리안은 이제야 주변의 시선이 아닌 가현의 집요한 눈빛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자, 자, 진정하고.”


리안은 가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화장실 방향에서 멀리 떨어진 직원 휴게실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일단 커피 한 잔부터 하자. 발표 자료 준비할 때 썼다 지웠다 했던 수많은 초고들이 내 머릿속에 아직도 그림처럼 선명하다고. 아마 그것부터 설명해야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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