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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10화

등불

by 오프리

서늘한 조명 아래, 객석의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 듯 경연의 무대는 리안의 호흡마저 집어삼킬 듯 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에는 수익성과 효율성이라는 질문이 이미 새겨져 있었고, 리안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주류의 흐름에 역행하는지를 알고 있는 동료들은 호기심과 우려가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사회자가 리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리안은 객석의 모든 시선이 등 뒤에 달라붙는 듯 한 압박을 받아내며 단상을 향해 숨을 꾹 눌러 담고 걸어갔다. 리안은 떨리는 손끝으로 거북핀을 매만지며 심호흡을 했다.

발표를 시작한 리안은 빔 프로젝터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1차 산업혁명부터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백오십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인류가 겪은 생멸의 혁신이 나열되었다. 리안은 그 혁신의 속도를 잠시 멈춘 채, 청중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18세기 수작업이 기계화로 바뀌고, 자율주행과 인공지능이 서가를 대체하려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용한 것은 무엇일까요?”


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리안이 제시한 답은 바로 '책'이었다. 논리는 명확했다. 인간이 책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인간 본성과 삶의 의미를 통찰하는 근본적인 행위는 변할 수 없지만, 문제는 책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이 안타까운 현상이었다.


“급변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느림의 미학입니다.”


리안은 마지막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바다거북 한 마리가 느릿하게 유영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멈추고 생각하는 여유와 틈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리안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저는 '거북 수족관'을 제안합니다. 책장 한가운데, 가장 느리고 긴 생명력을 가진 거북이들이 유영하는 수족관을 배치하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이 거북들이 서점이라는 공간이 지향하는 모든 가치의 태초적 상징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들은 긴 생명력만큼이나 책이 인류와 함께 오래도록 생존을 이어가길 바라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세속의 소음과 단절된 고요한 울림으로 대변해 줄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경연장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대부분의 경쟁 작들이 속도와 편의성을 외칠 때, 리안은 느림과 묵직한 생명력이라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며칠 후, 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공모전 결과를 확인했다. 총 5개 부문 중 시대정신 및 상징성 재정립을 지향하는 ‘등불’ 부문에서 리안의 아이디어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리안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시대에, 가장 느린 거북이 서점의 심장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현실로 증명된 것이다. 긴 생명을 염원하던 리안의 간절한 속삭임이 서점의 거대한 유리 수족관으로 탄생될 순간이었다. 리안은 거북이가 서점 안에서 책의 영속성을 상징하게 될 그날을 상상하며 벅찬 감동에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 성취는 단순한 경력의 한 줄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믿는 바를 세상에 관철시킨 리안의 세계가 마침내 현실과 포개진 순간이었다.






리안의 거북 수족관 아이디어가 본선 무대 경연장에서 등불 부문 1위를 차지하였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빚어내는 과정은 이제 막 시작된 험난한 산고 그 자체였다

‘이왕 들여오는 거 줄돔, 새우, 가재, 칠갑상어도 수족관에 넣자’는 주위의 실리적이고 대중적인 제언이 빗발쳤지만, 리안은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리안의 제안은 단순한 수족관 설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점을 대표하는, 영속성을 상징하는 마스코트여야 했다. 리안은 백화점식의 효율만 따른다면 일반 수족관과 다를 바 없다고 단언하며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주위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자, 리안은 ‘아이디어 오너십 카드를 꺼내 들었다. 리안은 이 아이디어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세워, 결국 초기의 소신을 관철시켰다. 거북 수족관은 C5 구역, 인문학 서적들이 묵직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거북 수족관 위치가 확정되자, 리안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리안은 자신의 ‘느림의 철학을 서점의 심장부에 새겨 넣겠다는 일념으로, 전문 설계팀과 초기 스케치부터 최종 마감재까지 세심하게 조율했다. 리안은 이 수족관이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사유의 중심이 되기를 바랐다. 리안은 C5 구역의 중심축에 수족관을 배치하고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 섬처럼 만들고자 했다.


마침내 주문 제작된 3천 리터 용량의 거대한 수족관이 배달되어 왔을 때, 리안은 그 육중한 존재감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바닥 둘레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비대칭의 굴곡을 따라 마치 수천 년 동안 파도가 만들어낸 섬의 연안처럼 유려했다. 거북 등딱지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수족관은 오랜 세월 마모된 거대한 바위가 서점의 한가운데 내려앉은 것처럼, 그 형태만큼이나 공간을 유연하게 포용하는 듯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서점 바닥이 낮게 웅크리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두꺼운 유리 벽면에 비치는 서점의 풍경마저 낯선 환영처럼 몽롱하게 번지는 것 같았다. 마치 외부의 인공적인 세계를 거부하고, 자연의 시간만을 담은 섬 하나를 통째로 서점 안에 옮겨 놓은 듯 한 신비롭고 강렬한 존재감이 공간을 압도했다.


수족관은 투명한 유리로 사방에 설치되어 사람들의 직접적인 접근을 차단했다. 높이는 천장에서 두 뼘 정도 낮은 돔의 형태를 띠었다. 천장은 크기가 제각각인 작은 원형 구멍이 수십 개 뚫려 있었다. 그것들은 흡사 밤하늘의 별자리 같기도 했고, 물속 생명체의 숨구멍 같기도 했다. 그 작은 구멍들을 통해 서점 천장의 조명이 은은하게 투과되었고, 이는 거북들의 여유로운 움직임과 어우러져 수족관 내부에 신비롭고 영롱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고립된 돔 안에서, 거북들은 리안의 마음처럼 외부의 분주함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독자들은 그 내부의 은밀한 공간, 즉 물속에 만들어진 작은 섬을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마치 숨겨진 비밀을 엿보는 듯 한 기분을 유도하며, 독자들은 지상의 관찰자가 되어 거북 섬의 침묵을 엿보는 사이, 잊고 있던 자신의 느긋한 시간을 발견하게 될 터였다.


거대한 유리에 반사된 서점의 불빛이 물결무늬를 그리며 일렁였다. 수족관 바닥에 채워진 맑고 투명한 물이 주는 시원한 냄새와, 물 밑을 흐르는 미약한 저류의 웅얼거림이 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전율했던 순간을 리안은 영원히 기억할 터였다.

완성된 수족관에는 여느 어항과는 다른, 고유한 결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바깥세상의 소음이 더 이상 닿지 않는 무중력의 공간 같았다. 세상의 모든 분주함과 결별한, 고요한 사색의 섬이었다. 발밑의 서점은 그대로였으나, 감각은 이미 세상의 모든 재촉이 멈춘 듯 느껴졌다. 마법의 유리막 너머, 이곳의 시간은 모래시계 속 미세한 모래알처럼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물길은 마치 육상 트랙처럼 길게 옆으로 늘어진 고리 모양이었다. 곳곳에는 완만한 경사로 된 작은 뭍이 있어서 거북이들이 물에서 쉽게 나와 빛을 쬐거나 쉴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마치 가족용 온천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해자가 깊은 안정감을 주었고, 그 주위로 모래와 싱그러운 수풀, 그리고 축소된 인공나무숲이 작은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리안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쉼터 앞에 놓인 펼쳐진 책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거북이가 그곳에 머리를 들이밀고 가만히 있을 때면, 사람들은 마치 거북이가 책을 들여다보는 듯 한 진귀한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북이들은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경계하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더 길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물길을 따라 헤엄치거나 뭍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활동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리안이 한 번씩 수족관 유리를 들여다볼 때마다, 리안의 시선이 채 닿기도 전에 거북이는 어느새 수족관의 다른 모서리로 멀찍이 이동해 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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