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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07화

푸른 지도

by 오프리

북 컨시어지 카운터에서 기계음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매번 영혼을 짜내는 리안의 조심스러운 습관은, 소민에게서 받은 날카로운 조언에서 비롯되었다.

카운터 옆의 북 컨시어지에서는 문의한 고객에게 도서를 추천해 주거나, 전화가 오면 정중하게 상담을 진행하는 곳이다. 전화벨이 울리자 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학습된 습관처럼 입 꼬리를 올리려 했지만, 문득 소민의 지적과 편의점 알바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안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리안은 억지로라도 영혼을 담아보려 애쓰며, “꿈을 키우는 세상 k문고 유리안입니다.”라고 멘트를 시작했다. 늘 똑같이 울려 퍼지던 이 문장이 오늘은 유독 어색하고 입술에 맴도는 듯했다. 리안은 이 단 하나의 문장을 위해 내면의 긴장을 모두 쏟아부어야 했다. 고객의 질문에 응대하면서도, 신경은 자신의 목소리가 기계음처럼 들리지는 않는지 온통 그곳에 쏠렸다.

온라인 서점이 대세로 굳어졌지만, 이곳 오프라인 매장에서 책의 촉감과 냄새를 느끼며 구매하는 충성 고객 역시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리안은 한 단골 중년 여성 고객에게 흔치 않은 은밀한 유대감을 가졌다. 그 여성은 온라인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책의 정보를 굳이 리안에게 두세 번씩 물었고, 늘 같은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느릿하게 펼쳐보곤 했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베푸는 느림을 향유하는 사람의 모습은 리안이 영혼을 바쳐 수호하고 싶은 숭고한 가치였다. 하지만 이 가치를 지키는 일은 리안의 몸에 선명한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서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리안은 가끔 종아리에 쥐가 나서 기상 시간보다 서너 시간 정도 일찍 고통스럽게 잠을 깨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마치 근육이 제멋대로 꼬여 들어가는 듯 한 격렬한 고통이었다.


코로나가 유행 3년 차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경각심도 다소 누그러진 듯했지만, 서점의 아침 루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리안은 매일 데스크 소독 청소를 꼼꼼히 진행했다. 신간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쉴 새 없이 입고되었다. 한번 불이 붙은 분야는 그 아류작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간되었고,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책들도 더디지만 꾸준히 서가를 채웠다.

리안은 매일 압도적인 양의 신작들을 손수 정리하면서, 과연 세상에 얼마나 많은 활자가 쏟아져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리안이 소민에게 신간 규모를 물어보았을 때, 하루 평균 대략 170여 종이 발행된다는 대답에 꽤나 놀란 적이 있었다. 활자로 세상을 점령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웅장한 물결 같았다. 리안은 신작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단조로운 노동 속에서 유발 하라리가 쓴《호모 사피엔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인간이 먹이 사슬의 최상단을 점유한 것은 10만 년 전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로 소통하며 글을 읽고 쓰는 능력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리안에게 서점은 단순한 일터를 넘어, 인간 이성의 숭고한 결실인 문명의 기록이 매 순간 증명되는 곳이었다. 언어가 창조해 낸 무한한 가치와 의미가 쉼 없이 재해석되는 성스러운 현장이었다. 손끝을 스치는 책장을 통해, 리안은 문명이 이룩한 언어의 지혜가 담긴 활자들을 지키는 파수꾼의 책무를 맡았다고 느꼈다. 그 책들은 인간 역사를 관통하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꾸밈없이 영원한 답을 소리 없이 증언하는 듯했다.








리안이 서점 근무 4년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종아리에 쥐가 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리안은 몇 달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소민의 진심과 걱정 어린 말을 듣고 병원에 갔다. 서늘한 진료실 조명 아래, 중년 의사는 피로를 감춘 냉철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오랜 시간 수많은 환자의 고통을 마주해 왔다는 듯, 그의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리안의 종아리에 돋아난 희미한 푸른 징후를 놓치지 않았다. 의사는 망설임 없이 하지정맥류라고 진단했다. 의사는 리안의 종아리에 수생 식물의 가는 뿌리처럼 퍼져 있던 실핏줄의 지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혹시 서서 일하는 직업을 갖고 계세요?”


의사는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기계처럼 물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는 냉철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심해지면 정맥이 피부 밖으로 우둘투툴하게 돌출될 수도 있고, 통증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내 그는 단호한 어조로 이었다.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당장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압박 스타킹을 착용하고, 한 자세로 오래 서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하고요. 틈틈이 종아리 근육도 풀어주세요.”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진료 의자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으나, 리안은 그 통증보다 더 격렬한 무언가가 다리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의사의 단호한 목소리는, 리안이 지켜온 느림의 가치'가 실은 신체의 파열을 초래했다는 냉정한 고발처럼 들렸다.

리안은 공원에서 조깅하던 사오십 대 아주머니의 종아리에 퍼렇게 튀어나온 핏줄을 보고 징그럽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문득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후로 리안은 무의식 중에 치마를 멀리하게 되었다. 책과 영혼을 나누는 일 이면에, 신체적 노동이 남긴 선명한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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