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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23화

장다리꽃

by 오프리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매일 반복됐던, 때로 무용하다는 생각까지 했던 하루하루의 일상들을 이제 추억 저편으로 묻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보통의 나날들이 왠지 아쉬워지는 걸까? 리안이 그렇게 상념을 하는 동안 제주행 비행기가 곧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기장이 곧 착륙 예정이라고 안내를 하자 리안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창밖에 야자수와 낮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제주 시내가 보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곧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리안은 비록 서울에서 효율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등 떠밀려 나왔지만, 아이리스 폴의 편지 속 단 한 사람을 위한 숨결이라는 소박한 빛을, 내면 깊은 곳의 등대처럼 떠올리고 나서야 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I가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리안이 밀려났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이 측정할 수 없었던 인간적인 깊이를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리안의 가슴에는 그 누구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느리고 깊은 서점의 풍경이 선명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쨍한 햇볕이 리안은 무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리안의 뺨을 어루만졌고,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할 기대에 찬 여행객들의 들뜬 웃음이 더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 고향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효율이나 데이터의 언어로 참견하지 않을 테니까. 리안은 무형의 짐을 내려놓은 듯 한 해방감을 느꼈다.

버스가 한라산 자락을 크게 휘감아 돌며 1135번 국도를 타고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제주 시내를 막 벗어나니 한적한 국도변 곳곳에 이맘때면 볼 수 있는 꽃무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란 노른자처럼 진한 유채꽃무리가 지나갔고, 멀리 지나가면서 봐도 알아볼 만큼 때를 맞아 생생하게 자란 수국이 파란색, 흰색, 바이올렛의 얼굴을 활짝 내밀고 있었다. 간간히 밀려드는 노곤함 때문인지 리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꾸벅꾸벅 졸았다. 리안이 탄 버스는 어느새 애월읍 새별오름을 지나고 곧 안덕면 원불오름을 지났다.


창문 너머 허옇고 길게 해안가를 따라 넓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흰 꽃이 얼핏 보면 메밀꽃 같지만 리안은 그것이 장다리꽃임을 알아챘다. 그 꽃은 아홉 살 늦봄 무렵, 폭풍우에 아빠를 잃은 기억을 순식간에 소환했다. 다정다감했던 아빠와 서귀포 남원에서 장다리꽃을 '동지고장'이라고 부르던 어린 날의 기억. 그리고 2주 만에 돌아온 싸늘한 아빠의 침묵 뒤에, 여전히 무심하게 흔들리던 장다리꽃. 리안이 서울에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멈춰버린 시간의 잔혹한 증거였다. 치유를 위해 돌아왔지만, 고향은 리안의 과거를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장다리꽃은 리안에게 두 겹의 과거를 동시에 연상시켰다. 오래전 멈춰버린 아버지의 침묵이 만들어낸 시간의 공백과, 풋내기 대학 시절 제주를 찾았던 친구들과의 단란했던 풍경이 리안의 의식 속에서 아득하게 중첩되었다.

리안의 아빠는 일하지 않은 날엔 늘 가족과 함께 했었다. 1톤 트럭을 몰고 제주 곳곳을 다녔다. 리안은 서귀포 남원에 있는 휴애리 공원 인근을 지나다가 메밀꽃밭을 발견했다.


“아방, 모멀고장이 피엇어요.” *


리안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사리 같은 검지로 장다리꽃을 메밀꽃이라고 가리키며 말했다.


“리안아, 저 고장은 ‘동지고장’이렌 한 거.” **


리안 아빠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다리꽃이라고 교정해 주었다. 리안에게 참 다정다감하고 자상했던 아빠는 이른 새벽에 고깃배를 몰고 조업을 나갔다가 풍랑을 맞아 행방불명이 되었고 시체로 발견되었다. 리안이 아홉 살 때 늦봄 무렵이었다. 2주의 수색 끝에 마주한 아빠의 싸늘한 침묵과, 옆에 놓여 있던 아빠의 낡은 지갑,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던 그 창백한 꽃의 선명함을 리안은 외면했다. 젊은 날의 동경과 함께, 고깃배 일을 하던 아빠의 사고가 남긴 이 지독한 장다리꽃을 보지 않을 곳으로 도망치듯 떠났던 것이다. 서울은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여서 적어도 그곳에서는 그 슬픔의 그림자를 가진 흰 꽃을 볼 기회는 없었다.


꽃잎이 불러온 기억의 회랑은 곧장 리안을 대학 2학년 시절로 데려갔다. 일찍 기말고사가 끝난 6월 중하순경, 리안은 친구들과 함께 제주 집으로 내려왔다. 리안이 친구들의 가이드가 되어 제주 명소를 데리고 다녔다. 애월읍의 어느 숙소 근처 푸른 밭을 지나던 중, 리안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릴 적 아빠와 함께 보았던 그 꽃이었다. 하얗고 자잘한 꽃들이 가득 피어난 광경에 친구들은 메밀꽃이라 반기며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바빴다.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리안은 혼자 그 꽃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리안은 영숙이 친구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문득 장다리꽃에 대해 물었다.


“어멍, 오늘 밭에서 하얀 꽃 봐 신디, 그게 장다리꽃이라멘? 친구들은 메밀꽃이라고 해수과......” ***


“아이고, 장다리꽃은 꽃 이름이 아니여. 배추나 무 같은 채소가 꽃 피울라게 쭉 뻗은 꽃줄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 하영 고집스러운 꽃이여.” ****


영숙은 멸치 육수를 끓이던 냄비에서 잠시 눈을 떼지 않은 채 설명했다. 무나 배추는 꽃이 채 피기도 전에 사람 식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평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농부들은 다음 해 재배를 위한 씨앗을 얻으려고 일부러 꽃을 피우게 둔다.


“그럭 허멍 꽃 피우민,” *****


영숙이 조용히 말했다.


“풀으른 잎이랑 뿌리서 머근 거 싹 다 씨앗 맺을라 허멍 다 써 불 주게. 그랜 허멍 끝내 뿌리도 잎도 병들어 죽어부난. 다음 거 살리 주게 허멍, 제 몸 몽땅 내주는 꽃이주게.” ******


리안은 어머니의 덤덤한 설명 속에서 갑작스러운 울컥함을 느꼈다. 그날 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회포를 푸는 동안 내내, 모든 것을 소진해 버린 장다리꽃과 자신의 모든 것을 바다에 내어준 채 돌아오지 못한 아빠의 모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아빠의 상실은 리안에게 '삶의 모든 것을 바치면 결국 소멸한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느리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조각들이 눈꺼풀 아래서 산산이 부서졌다. 서울의 차가운 효율은 제주에서 경험했던 무력한 슬픔으로부터 리안을 보호해 주는 방패였다. 하지만 AI라는 시스템의 냉정함은 느리고 소중한 것들이 결국 속도의 틈바구니에서 사라진다는 아빠의 죽음이 가르쳐준 삶의 냉혹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리안은 적어도 AI와는 싸울 수 있었지만, 아빠의 과거와는 싸울 수 없었다. 리안이 이제 맞서야 할 싸움은 AI가 아닌, 해결되지 않은 채 제주에 남아있는 아빠의 과거와 피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경계 모호한 내면의 몫이었다.


‘나는 아이리스 폴에게 '잠시 멈춰도 된다'라고 했지만, 정작 나는 이 장다리꽃 앞에 멈춰 서는 것이 두려워 도망쳤구나.


리안은 깨달았다. 진정한 극복은 제주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장다리꽃이 지지 않는 땅에서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내는 것임을. 리안이 아이리스 폴에게 허락했던 그 '멈춤'이야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치유의 첫걸음이었다. 리안은 창밖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자신의 길은 아이리스 폴이라는 타인의 구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빠의 상실이라는 개인의 치유에서 비롯되었음을. 리안의 고독한 삶의 변주는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애도할 시간을 찾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 “아빠, 메밀꽃이 피었어요.”

** “리안아, 저 꽃은 장다리꽃이야.

*** “엄마, 오늘 밭에서 하얀 꽃 봤는데, 그게 장다리꽃이라며? 친구들은 메밀꽃이라고 해서......

**** “아이고, 장다리꽃은 꽃 이름이 아니야. 배추나 무 같은 채소가 꽃을 피우려고 쭉 뻗은 꽃줄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 아주 고집스러운 꽃이야.

***** “그렇게 꽃을 피우면,

****** “식물은 잎과 뿌리에서 섭취한 모든 영양소를 오로지 씨앗을 맺는 데만 소진해 버려. 그리고 결국 뿌리와 잎이 병들어서 죽지. 다음을 위해 모든 걸 내어주는 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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