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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22화

곤마의 쉼표

by 오프리

아이리스 폴이 책을 사간 그날로부터 며칠 후, 리안은 본사로부터 정식 통보를 받았다. '북큐레이팅 업무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직무 조정이었다. 리안의 주 업무는 AI가 내린 진열 지도에 따른 재고 도서의 재배치와 새로 신설된 'AI 인사이트 존'을 관리하는 업무로 재편되었다.

리안은 텅 빈 거북 수족관 자리를 대체하여 들어선 AI 인사이트 존을 볼 때마다, 자신이 한때 희망했던 느림의 미학이 효율이라는 시대적 명제에 의해 조용히 밀려나고 있음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제 리안의 직무는 독자와 책 사이의 울림을 창조하는 영혼의 조율사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손에 불과했다. 리안은 자신이 사람과 책을 연결하는 인간적인 통로가 아니라, AI가 던져준 짐을 운반하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완전히 밀려나 벼랑 끝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동해 바닷가에서 얻은 느리고 깊은 통찰을 안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리안은 이미 AI와의 무의미한 속도 전쟁을 멈추고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낼 바다로 떠나야 한다는 확고한 심증을 굳혔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밤의 폭풍 같은 침묵이 필요했다. 리안의 손은 이미 퇴사 서류를 작성하는 문서를 열었지만, 커서 앞에서 몇 시간이고 멈춰 서 있었다. ‘내가 서점을 떠나도, 나는 나만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는 휴가 중의 고요한 확신은 차가운 사무실 공기 속에서 나약한 희망처럼 흔들렸다. 서점을 떠나는 순간, 자신이 경제적인 생존을 넘어 존재의 의미마저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정말 무용지물인가.


리안은 다시 한번 바둑판 위의 곤마를 떠올렸다. 상대 진영에 둘러싸여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곧 포획될 운명의 말. AI의 무오류성이 지배하는 이 서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리안의 인간적인 공감과 지식은 더 이상 점수를 내지 못하는 가치 없는 수(手)가 되어버린 걸까. 서점 일은 단지 직업이 아니라, 아빠의 상실 후 매달렸던 삶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영숙처럼 다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절박함과 영혼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자존심 사이에서 리안은 심장 내부에서 그동안 차곡차곡 채워온 거대한 책장이 무너지는 듯 한 통증을 느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출구는 아닐지라도, 결국 이 꽉 막힌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 퇴사밖에 없다는 것에 리안은 숙명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리안은 무겁게 감겨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귓가에 다시금 둔중한 비행기 엔진의 소리가 밀려들었고, 눈앞에는 비행기 좌석의 희미한 직물 패턴이 아득하게 들어왔다.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안, 리안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이제 눈 감고도 하루 일과가 머릿속에 그림처럼 떠오르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던 5년 전 그 시절엔 마치 길을 잃지 않으려고 어린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졸졸 따라다닌 것처럼 선배 뒤꽁무니만 온종일 쫓아다녔다. 그 어색하고 서툴렀던 서점 생활의 잔상은 이제는 사라지고, 활자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되새기는 자발적인 배움의 공간으로 서점이 리안의 삶에 깊이 자리 잡았건만, 결국 AI에게 그 공간을 내주고 리안은 지금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리안의 손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속도에 맞서 모래밭을 뒤지듯, 묵묵한 메시지가 담긴 책을 찾아 탐색하던 큐레이터의 손이 아니었다. 오직 인간의 본질을 향한 탐구심과 변치 않을 활자의 가치만이 리안의 움직임을 지배했으나, 그 신념이 남긴 잔흔은 지금 나약한 상태로 다음 서곡을 기다리는 미결의 유산이었다.






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한 자를 적어 내렸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삶의 뼈대와 유일한 끈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내는, 파멸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그 순간, 마음속 견고했던 서점의 벽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퇴사 처리 절차를 마치고 리안이 책상 정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사물함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발신자 주소가 없는 익명의 우편물 하나가 사물함에 놓여 있었다.


제게 필요한 ‘쉼표’를 알려주신 분께.

당신이 추천한 그 책이, AI가 보여준 ‘잘 살라’는 이야기보다 더 절망적이고 동시에 더 희망적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되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존재의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서점을 배회했지만, 저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니라, 내 영혼이 숨 쉬고 기댈 만한 나라는 존재가 찾아야 할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그 작은 메모와 책이 저에게는 ‘잠시 멈춰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신의 눈빛은 모두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효율을 제시하지 않고, 상실감에 젖은 인간에게 필요한 온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메모의 끝에는 아무런 서명도 없었지만, 리안은 이 쪽지가 '아이리스 폴'이라 불렀던 그 남자에게서 온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리안은 자신이 추천한 책을 아이리스 폴이 사 갔던 그날 이후 매일같이 서점을 드나들던 발길이 끊어졌기에 한동안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지만, 익숙지 않은 투박한 필체는 이 편지의 발신자가 아이리스 폴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지를 든 리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운 인공지능 솔루션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고 절망하던 순간, 리안은 AI가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활자의 묶음이 아니었다. 한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꽉 쥐어준 등불이었으며 길 잃은 자의 삶의 방향을 조용히 일깨운 이정표였다. 고요한 나침반은 무심한 효율의 거대한 흐름 속에 던져진 최초의, 그리고 소중한 닻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울림이었다.


리안은 그 편지를 가슴에 품은 채, 비로소 숨을 쉬었다. 자신의 역할은 AI가 요구했던 다수를 위한 통계적 효율이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의 그림자를 읽어내고, 그 한 사람의 영혼에 닿는 섬세한 숨결이야말로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임을 가슴 저릿하게 자각했다.

더 이상 서울은 리안을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리안은 발길이 느리고 낮은 곳을 향해야 함을 알았다. 그곳은 고독한 방식으로, 상업적인 셈법에서 외면받은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될 리안만의 장소, 바로 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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