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인가, 리안의 시야에 한 남자 손님이 들어왔다. 50대 초반의 남자로, 말끔하지만 유행이 지난 정장 차림이었다. 넥타이가 미세하게 구겨져 있어 마치 그의 내면처럼 팽팽함이 빠진 풍선 같았다. 리안은 그를 속으로 '아이리스 폴(Iris-Fall)'이라 불렀다. 상실감으로 깊이 추락한 듯한 얼굴이었지만, 책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만큼은 무지갯빛처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어떤 메시지를 찾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리스 폴은 늘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나타나, 가족/관계 섹션 근처를 배회했다. 그의 손에는 어떤 책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서점의 키오스크 앞에 서서 몇 번이나 ‘인생의 전환점’, ‘이혼 후 홀로서기’ 같은 키워드를 검색했다. 그때마다 키오스크는 쾌활한 목소리로 AI 추천 도서 목록을 화면에 띄웠다. 베스트셀러 여행 에세이, 긍정 심리학 자기계발서, 심지어 재테크 관련 서적까지. 아이리스 폴은 그 책들의 표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속삭이는 먼지처럼 중얼거리며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리안은 그 미세한 중얼거림을 들었다. AI가 그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상업적으로 잘 팔리는 해결책'이었지만, 그가 정작 필요했던 것은 '인간적인 공감과 느림의 위로'라는 것을 리안은 직감했다. 아이리스 폴의 눈빛에서, 리안은 제주 구옥의 서늘한 기운이나 어머니의 방에 드리웠던 붉은 노을 같은 것을 읽어냈다. 그것은 데이터가 아닌, 몸으로 익힌 고독의 언어였다. AI가 아이리스 폴의 소비 지수를 읽어내는 동안, 그의 상실감은 데이터화되지 않는 습기처럼 서점 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리안은 그 습기를 느꼈다.
리안은 그날 퇴근 후, 방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이삿짐 더미 앞에 섰다. 곧 제주로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지난 서울 생활의 잔재들을 정리해야 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중고 서점에 팔려고 따로 빼둔 책 무리가 쌓여 있었다. 리안은 그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는 소중했지만 이제는 상업적인 가치로밖에 환산되지 않는 것들.
문득, 그 무리 속에서 한 권의 책이 리안의 손에 잡혔다. 익명의 작가가 쓴 오래된 순수 문학 소설이었다. 인생의 깊은 어둠 속에서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느리게 회복하는 과정을 담은 책이었다. AI가 결코 추천하지 않을, 판매 지수 0%의 책. 이 책은 리안에게도 한때 '버리고 싶은 과거'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리안은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누군가를 위로할 힘에 있음을 깨달았다. 리안은 그 책을 다시 서점으로 가져왔다. 이 책의 운명은 상업적 셈법이 아닌, 인간적인 이해와 공감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다.
다음 날 오후 세시 경. 아이리스 폴이 서점에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리안은 빠르게 움직였다. 리안은 AI 추천 도서 코너에서 약간 떨어진, 사람들이 잘 들여다보지 않는 '느림의 사색' 코너에 그 책을 꽂았다. 그리고 책 표지 안쪽 첫 페이지에 작은 메모를 적어 넣었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할 시간. 누구나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손톱만큼 작은 메모. AI는 이 책의 판매량은 계산할 수 있지만, 메모의 무게는 측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리스 폴은 평소처럼 AI 추천 책들을 슬쩍 보고 내려놓더니, 마지막 순간에 리안이 꽂아 둔 책 앞에서 멈췄다. 아이리스 폴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친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리안이 숨겨둔 메모를 발견한 순간, 아이리스 폴은 서가에 기대선 채 수묵화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 아이리스 폴의 홍채 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며 동시에 빛나는 것을 리안은 보았다. 아이리스 폴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리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리스 폴은 그 작은 글귀를 몇 번이나 소리 없이 되뇌었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할 시간. 누구나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이 느림의 허락 앞에서, 아이리스 폴이 그토록 서점에서 찾고 있었던 AI의 효율적인 해결책들은 한순간에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그는 즉시 책을 집어 들지 않았다. 아이리스 폴은 책을 슬쩍 내려놓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뒤로 돌아 서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이리스 폴은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는지 서점 구석구석을 예민하게 스캔했다. 마치 피부 밑을 파고드는 벌레가 몸의 어디쯤에 있는지 몰라 불안하게 자신의 몸을 더듬는 사람처럼. 아이리스 폴은 직원 유니폼을 입은 리안을 언뜻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손님에게 찾아줄 책 제목을 눈으로 훑으며 손가락 마디로 책 등을 톡톡 건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리스 폴은 다시 책 앞에 섰다. 서가 사이의 공기가 멈춘 듯, 짧고도 긴 시간이 흘렀다. 아이리스 폴은 잠시 망설였다. 책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자신이 서점 중앙 AI가 추천한 효율적인 삶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했음을 선언하는 것만 같았으므로. 이 책을 집는다는 것은 자신이 겪는 고통과 상실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느림과 치유의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이리스 폴은 책을 덮지 않고, 얇은 표지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 감싸 쥔 손은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마치 고독의 언어를 발견한 사람처럼, 아이리스 폴은 계산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