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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19화

손맛

by 오프리

리안은 휴가를 신청했다. 그것은 리안의 동료들에게는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리안은 서점에 발을 들인 이후 단 한 번도 정식 휴가를 길게 사용한 적이 없었다. 리안은 책과의 연결을 하루라도 끊을 수 없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법으로 보장된 연차까지 책 진열 주기를 맞추는 데 쏟아부었던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리안이 아프리카 기근처럼 휴가를 굶주려왔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이번 휴가는 치밀한 계획이라기보다, 가슴에 짊어진 활자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도피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북큐레이터 리안이 확고히 간직했던 느리지만 인간의 본질을 향한 내면의 등불은 AI의 무감한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차가운 숫자의 논리 앞에 빛을 잃고 말았다. 리안에게 마지막 남아있던 희망조차 꺼져가는 촛불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리안은 도시 소음과 모니터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는 절박한 충동에 이끌려 동해의 작은 어촌 마을로 몸을 실었다. 휴가 첫날 내내 바다를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리듬만이 단 하나의 읽을거리였다. AI가 절대 포착할 수 없는 바다의 냄새, 모래의 질감, 그리고 고요한 침묵의 무의미함 속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육체의 느슨함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이틀째 되던 날 오후, 리안이 방파제에 앉아 맥없이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민박집 주인 할머니가 리안에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손에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과 갓 쪄낸 고구마 몇 개를 들고 있었다.


“아가씨는 며칠째 바다만 보고 있네. 바다에 무슨 귀신이라도 붙었나? 책방 일 한다더니, 책이 아니라 고민을 잔뜩 짊어진 것 같구먼.


할머니의 느리고 투박한 말씨가 리안의 가슴속 응어리를 파도가 모래를 쓸어가듯 천천히 씻어냈다. 리안은 고구마를 받아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할머니, 저는 책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팔았는데, 이제 사람들이 제 마음이 아니라 기계의 빠른 계산을 원해요. 제가 혼신을 담아 만든 하나의 가치가, 그 기계의 천 개의 계산에 졌어요.


할머니는 기계가 뭔지는 몰랐지만, 하나의 가치와 천 개의 계산의 충돌은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빨리빨리 돈 벌고 싶은 건 세상 이치. 바다에서도 하루 종일 그물질 하는 사람이 있고, 천천히 손맛으로 특별한 장을 담그는 사람이 있어. 그물질이 돈은 빨리 벌지. 하지만 사람들이 몇 년이고 그 맛을 못 잊어서 다시 찾아오는 것은, 천천히 익힌 그 손맛 덕분이거든. 시간이 들어가야, 세월이 가도 안 잊히는 맛이 나는 법이야.


할머니의 대답은 리안의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단번에 뚫고 들어왔다. AI는 천 개의 빠르고 쉬운 답을 줄 수 있지만, 리안의 방식은 시간이 들어가서 안 잊히는 손맛을 주는 일이었다.

다음 날, 리안은 민박집 주인 할머니가 손님들의 숙박 기록을 정리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POS 기계나 태블릿 대신, 가장자리가 닳아 희끗하고 깊은 주름이 파인 낡은 가죽 장부를 펴고 있었다. 그 장부의 기록은 리안의 큐레이터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할머니는 숙박 날짜와 요금 옆에, 그 손님에 대한 사적인 메모를 삐뚤어졌지만 어찌 보면 단아하기도 한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어 넣었다. 메모 끝에는 '안경 쓴 인상 좋은 분', '아이가 밤새 울어 미안해하던 가족' 같은 문장과 함께, 할머니만의 사적인 단서가 기호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미소를 의미하는 작은 (°◡°) 표식이나, 안경을 쓴 모양의 (◎-◎) 기호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것은 느리고 비효율적인 기록 방식이었다.


리안이 서점에서 다루던 AI의 빅데이터가 무엇을 샀는가에 집중한다면, 이 낡은 장부는 누가 이 공간을 필요로 했는가에 대한 인간의 냄새가 나는 데이터였다. 할머니에게는 그저 돈을 지불한 손님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개인의 삶이 기록되고 있었다. 리안은 그 따뜻하고 인간적인 애정이 스민 기록에서, AI의 빅데이터가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인간 영혼의 좌표를 발견했다.

책의 가치가 판매량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울림에 있듯이, 서점의 가치는 효율적인 회전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방황과 사유를 얼마나 오래도록 기다려 줄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AI가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은 바로 이 느리고 사적인 기록 속에 있었다.


휴가는 당장의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할 즉각적인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민박집의 낡은 장부가 남긴 강렬한 영감의 잔재는 리안에게 AI가 건드릴 수 없는 느리고 사적인 기록의 가치를 확신하게 했다. 리안은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깨달음을 직장 내에서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안은 북큐레이터 리안이라는 정체성의 껍데기만 남긴 채,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곤마 상태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고요했던 휴가의 끝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의 처절한 외로움으로 더해졌다.

리안은 얇은 이불 속에 몸을 묻은 채, 내일 아침 무언가를 결심하고 깨어나기를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벽면 창문의 미세한 틈 너머로, 동해바다의 물결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리안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자장가에 눈꺼풀이 스르르 잠겼다.


도시의 숨결을 닮은 기차는 시간의 간극을 메우듯 맹렬히 질주하며, 동해를 떠난 리안을 도시의 활자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기차 창밖으로는 광활한 들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리안은 창문에 기대어 도시의 속도와 대비되는 자연의 시간을 품은 풍경을 응시했다. 민박집 할머니의 낡은 장부와 시간이 들어가야 안 잊힌다는 맛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리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안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갇혀 있는 곤마의 감옥은 k문고라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대형 서점 시스템 안에서만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집착이었다. AI는 k문고를 지배하였지만, 인간적인 본질의 가치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 가치는 할머니의 사적인 기록처럼, 어떤 거대한 시스템 바깥에서도 유효했다.


리안의 마음속,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퇴사라는 단어가 묵직한 울림과 함께 조심스럽게 피어올랐다. 그 거대한 서점 안에서 AI와의 무의미한 속도 전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차라리 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나만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당장 실행할 현실적인 해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리안을 짓눌러왔던 곤마의 족쇄가 풀리듯, 내면의 고통스러운 응어리가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존재의 무게가 사라지고 고요한 평정심이 리안을 감쌌다.


“내가 서점을 떠나도, 나는 나만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


이 확고한 심증은 리안을 짓누르던 곤마의 절망을 자발적인 해방의 가능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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