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도서 하나를 선정하는 일은 고된 일이다. 책 내용을 빠삭하게 알아야 함은 물론이고, 작가의 의도와 독자층까지 깊이 있게 파악해야 하는, 활자로 된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일이었다. 리안이 그 모든 고단한 과정을 버텨온 데에는, 자신이 혼신을 다한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울림을 줄 거라는 나름의 보람과 긍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AI가 추천한 책들이 황금률처럼 중앙 서가를 채워가며 주류가 되었고, 리안의 지난 큐레이션은 비효율적인 낭비로 분류되어 구석으로 밀려났다. 리안은 스스로를 스러져가는 겨울 해 질 녘의 그림자처럼 느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리안 팀의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리안과 함께 느림의 철학을 공유했던 선배 큐레이터 두 명이 비인간적인 업무 속도와 무의미함에 질려 끝내 큐레이터 직무를 포기하고 다른 부서로 옮겨갔다. 내부적으로는 이미 연말 조직 개편 시 리안의 부서가 AI 효율화 대상 1순위로 지목되어, 대폭 축소되거나 해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리안은 외롭고 불안한 섬처럼 남겨졌다.
리안은 자신이 AI의 수족이 된 기분이 들었다. 느림의 가치를 지키려 했던 큐레이터의 자리에서 밀려난 지난 두 달간, 리안이 한 일이라고는 차가운 모니터가 만든 책 진열 지도를 보면서 AI가 추천한 책들을 기계처럼 진열대로 옮겨 놓는 일이었다. 리안의 주된 업무는 이제 고객 동선을 파악하는 센서가 고장 나지 않게 관리하는, 점점 더 비인간적인 일로 축소되었다. 진열 주기는 더욱 빨라졌다. AI는 수시로 리안에게 오더를 내렸고, 리안은 영혼 없는 일꾼처럼 그 일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시간은 잠시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듯, 리안을 옥죄던 서점의 냉기 위로 또 하나의 검은 전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불길한 소문이 파문처럼 퍼졌다.
거북 수족관은 리안에게 느림의 철학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유일한 증거였다. 이제 그 섬이 비효율의 낙인을 안고 사라질 운명이라니, 그것은 단순히 물건 하나가 철거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슴 한복판을 도려내어 AI의 차가운 데이터 코너로 메우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무릎 아래부터 차오르는 차가운 절망과 함께, 리안은 제자리에 선 채 모든 감각이 얇은 얼음 아래로 침잠하는 것을 느꼈다. 비효율이라는 그 간결하고도 잔인한 활자가, 자신이 만들었던 작은 섬의 윤곽을 지워버리는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리안은 소문의 진위를 따질 새 없이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다. 온힘으로 만들어 온 느림의 철학이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히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긴급명령이 리안의 어깨를 짓눌렀다. 리안은 담당 매니저를 곧장 찾아가 거북 수족관의 존재 이유를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수족관은 단순한 전시물이 아닙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멈추는 공간입니다. 고객들이 그 앞에서 5분을 멈춰 서서 사색하고, 불안을 잠시 내려놓는 가치는 어떤 숫자로도 측정할 수 없습니다!”
매니저는 싸늘하게 리안의 말을 끊었다.
“리안 씨, *IBRS 보고서에 따르면 C5 구역의 고객 상호작용 지수는 전년 대비 18%가량 낮습니다. AI의 목표는 숙고가 아니라 빠른 구매 결정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공간을 비효율적인 상징물로 놔둘 여력이 없습니다. 서점은 박물관이 아니니까요.”
담당 매니저의 차가운 논리는 반론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벽처럼 리안을 가로막았다. 리안은 말없이 그의 시선을 받아냈으나, 내면에서는 이미 끓어오르는 반박을 억누르고 있었다. 숫자로 짓밟힌 철학을 되찾아오려면, 감성적인 호소가 아닌 더 강력한 숫자가 필요했다. 수족관 주변을 맴돌다 책을 구매한 고객의 패턴을 수동으로 추적했고, 고객 설문지에서 서점 공간에 대해 인상적으로 언급한 수백 건의 메모를 긁어모았다. 그날 밤, 리안은 차가운 모니터 앞에서 밤샘 작업으로 매니저의 논리에 맞설 무기를 벼려내기 시작했다.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으나, 그 고독한 노력은 AI가 하루 만에 쏟아내는 방대한 데이터 앞에서는 모래 한 줌에 불과했다.
리안은 다음날 다시 매니저를 찾아갔다.
“매니저님, 이 자료를 보세요! 수족관 주변에서 구매한 책의 '완독률'은 다른 코너 대비 27% 높습니다. 이는 고객이 충동적 구매가 아닌 깊이 있는 연결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저희의 목표는 단기적인 판매가 아니라, 백 년 서점의 가치를 만드는 것 아닙니까?”
매니저는 리안이 내민 두꺼운 보고서를 훑어보지도 않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리안 씨의 열정은 알지만, 회사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철거가 시작됩니다.”
리안은 결국 영혼이 깃든 거북섬을 지키는 데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고독한 신념의 축적물은 차가운 효율이라는 속도 앞에서 무참히 좌절되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남아있었다.
“철거는 회사의 결정이니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거북들을 제가 키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서점의 상징으로 쓰였던 아이들인데, 폐기물 처리하듯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공간을 잃은 대신, 리안은 거북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하지만 열 마리가 넘는 거북 전체를 자신의 여덟 평 원룸으로 데려가겠다는 리안의 무모한 제안을 매니저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리안 씨, 그건 규정 위반입니다. 회사 소유의 생물들을 사적으로 전부 반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생물을 혼자 다 데려가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리안은 매니저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췄다.
“규정은 압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닙니다, 매니저님. 지난 1년 동안 서점의 상징이었고, 느림의 철학이었습니다. 회사의 얼굴을 폐기 처분하듯 다른 기관에 넘겨버리는 건 또 다른 비효율입니다. 제가 그 책임을 지고 데려가서, 서점의 가치를 이어가게 해 주십시오.”
리안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끈기가 스며 있었다. 매니저는 리안의 필사적인 표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길어지는 실랑이에 짜증이 난 듯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매니저는 더 이상의 감정적 소모를 피하려는 듯 리안의 말을 잘랐다.
“좋습니다. 회사의 상징이었던 세 자매만 리안 씨가 임시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대신, 생물 관리에 대한 전적인 책임과 추후 문제 발생 시 모든 비용 부담을 서약해야 합니다. 나머지 거북들은 다른 기관으로 규정에 따라 이송될 것입니다.”
결국 리안은 절반 이상을 포기하고서야, 아끼던 거북이 세 자매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는 것을 간신히 허락받을 수 있었다. 며칠간의 끈질긴 요청 끝에 얻어낸 그 결과는, 리안이 AI의 효율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얻어낸, 미약하지만 소중한 승리였다.
리안은 회사 여자 휴게실 구석을 거북이들의 임시 거처로 정했다. 서가 관리용 창고를 뒤져보니, 물품 보관용으로 쓰던 낡은 투명 아크릴 통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3천 리터짜리 거대 수조와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당분간 세 자매가 버티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가현이 퇴근시간을 미루고 거북이들을 새 아크릴 통으로 옮겨 담는 리안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거대한 수족관이 사라지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가현은 리안의 등을 조용히 두드렸다.
“리안아, 네가 얼마나 공들인 공간인지 알아. 네가 서점에 심으려 했던 건 AI가 처리하지 못하는 느림의 가치였잖아. 회사는 그걸 몰라본 거지. 하지만 걱정 마. 너의 그 철학은 사라지지 않았어. 봐, 네가 이렇게 살아있는 느림의 세 활자들을 품고 가는 거잖아.”
가현의 따뜻한 위로에 리안은 잠시 울컥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리안은 꼼꼼함을 발휘해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일단 수조를 세척한 후, 거북이들이 서점에서처럼 깊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정수된 물을 채웠다. 리안은 서늘한 창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작은 이동식 온열등을 찾아내 아크릴 통 위에 설치했다.
“근데 얘네 서점에서 먹던 고급 사료 있어? 영양 불균형 오면 안 되지 않아?”
가현의 말에 리안은 정신을 차렸다.
“맞아! 먹이! 일반 사료 말고, 고단백 사료가 필요해. 그리고 얘네들 물에 있는 시간보다 뭍에 나와서 체온 조절하는 시간이 더 중요한데. 조그만 돌멩이라도 구해서 육지 역할을 해줘야 하거든.”
“고민할 것 없어. 거북이 박사님, 내가 당장 사 올게!”
가현은 자발적으로 근처 다이소로 달려가 고단백 거북 사료와 비타민 보충제, 그리고 통 안에서 뭍의 역할을 할 만한 인조 잔디 조각까지 사 왔다.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두 사람은 휴게실 구석에 앉아 아크릴 통의 임시 생태계를 조성했다.
리안은 자신의 소중한 공간을 잃었지만, 최소한 세 자매의 생존은 지켜낼 수 있었다. 거북이들이 낯선 환경에 경계하며 아크릴 통 바닥에 가만히 웅크렸다. 리안과 가현은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그 작은 투명한 벽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회사 휴게실 구석, 차가운 효율이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리안의 느림의 철학을 상징하던 세 거북과 그들을 지키려는 두 사람은 마치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격리된 채 버려진 듯했다.
가현은 웅크린 거북들을 내려다보며 문득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리안아. 거북이들이 서점에선 느림의 상징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우리 같아. 쫓기듯 좁은 곳으로 밀려났는데, 여기서 다시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에서 가져온 온열등 아래, 거북들의 작은 등딱지 위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그 순간만큼은, 휴게실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느림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