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리안이 자신의 내면의 지도에 뜨겁게 몰입하던 순간에, 냉정하고 무심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시스템 업데이트와 함께 AI 지능형 추천 도서 목록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직원용 단말기에 추가된 것이다. 초반에는 베테랑 큐레이터의 경험을 보조하는 참고 자료에 불과했다. 하지만 AI의 추천은 오차 없이 정확했고, 심지어 리안이 고객에게 들었던 심리적인 단서까지 학습한 듯 섬뜩하게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리안에게 한 권 한 권의 책은 길고 긴 사유의 시간을 요구했지만, AI는 리안의 일주일 동안의 사유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수백만 개의 판매량과 서평을 매 순간 갱신하며 살아있는 데이터의 강물을 숨 쉬는 시간만큼 빠르게 분석하고 답을 내놓았다.
리안에게 치명적이었던 건, AI의 압도적인 성능이나 자신의 철학에 대한 주변의 무관심이 아니라 단골마저 변해버린 싸늘한 반응이었다. 안 교수는 리안의 확실한 지지자였다. 그는 수년 동안 책 내용이 아니라 리안의 눈빛과 손짓에서 자신이 찾던 지식의 방향을 읽어냈다. 마치 리안이 자신의 내면을 섬세하게 조율해 주는 조율사인 것처럼. 안 교수는 영혼의 파장을 맞추는 연결을 증명해 주던 산 증인이었다.
어느 날, 안 교수가 북 컨시어지 데스크를 찾았다. 때마침 서가 순례를 나온 리안은 안 교수의 최근 연구 주제와 내면의 고민을 꿰뚫어 보고, 며칠 전 밤샘 독서 끝에 발굴한 희귀한 서적 한 권을 조심스럽게 추천했다.
“교수님, 이 책은 지금 교수님께서 찾으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느리고 심오한 통찰을 제공할 겁니다.”
리안의 눈에는 확신과 기대가 가득했지만, 안 교수의 시선은 리안의 추천 도서 대신, 데스크 옆에 새로 설치된 AI 추천 키오스크로 향했다. 안 교수는 리안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디지털 화면에 자신의 검색어를 빠르게 입력했다. AI가 리안이 추천한 책과 완전히 다른 판매량 상위 1%의 최신 인문서를 내놓는 데는 1초가 채 안 걸렸다. 안 교수는 잠시 화면과 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깊게 망설였다. 그의 눈빛에는 리안의 통찰에 대한 오랜 신뢰와 AI의 압도적인 정보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괴로운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안 교수는 리안에게 미안함이 담긴 짧은 목례를 건네더니 곧 냉철하게 표정을 다잡았다.
“유리안 큐레이터님의 통찰은 여전히 훌륭합니다. 제게 한 권의 우주를 선사하셨지요. 하지만...... AI는 저의 시간을 아껴주네요. 리안 큐레이터님은 저에게 한 권을 추천하셨지만, 이 기계는 제가 놓쳤을 백 권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안 교수는 리안이 추천한 책은 가볍게 내려놓고, AI가 제시한 책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리안은 그 순간 세상이 멈춘 듯 한 충격에 빠졌다. 안 교수의 합리적인 외면은 리안의 윤리적 고집과 고군분투를 빠른 속도로 무효화시켰다. 내부의 냉랭한 시선 속에서도 지켜냈던 신념이 오히려 자신을 쫓는 맹수의 숨소리처럼 옥죄는 덫이 되어 등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유일하게 기대어 서 있던 등 뒤의 벽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인간적인 끈은 이제 가장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선택이 되어버린 것일까? 리안은 AI의 승리 앞에서, 인간 북큐레이터로서의 극심한 위기감과 존재의 상실감에 휩싸였다.
기내에서 바라보는 원형 창밖에 솜털 같은 구름들이 해체되는 파도처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리안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엔진의 둔중한 진동이 리안을 일정한 리듬으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리안은 창가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많은 밤을 새우며 몰두했던 열정의 흔적, 그리고 그 열정이 끝내 좌절로 돌아선 그림자가 교차했다. 리안은 무릎 위에 올려둔 얇은 재킷 위로,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리안은 손바닥을 뒤집어, 그 위로 차가운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그땐 참 호기로웠지…….’
리안은 눈을 감았다. 비행기의 소음이 멀어지며, 마치 시간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리안의 내면 깊은 곳에서,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한번 강하게 응축되기 시작했다.
리안의 작은 두 주먹 안에는 수없이 조마조마했던 날들의 종잇조각 같은 고뇌와 철옹성 같은 확신이 뒤엉켜 있었다. 속도와 자극이 미덕처럼 소비되는 세상에서, 독서를 통해 사유의 힘을 키우고 인간 본성과 삶의 의미를 성찰케 하려는 길은 외롭고도 버거운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