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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15화

미생의 사활

by 오프리

리안의 서가 순례는 자신만의 신성한 의식이었지만, 직장 내의 셈법은 리안의 숭고한 신념에 오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북큐레이팅 부서의 중요한 과제는 얼마나 많은 책을, 얼마나 빠르게 회전시키는 가였다. 리안이 서너 권의 책에 대해 일주일의 사유를 투자하는 동안, 다른 큐레이터들은 이미 열 권 이상의 책을 기획 목록에 올리고 있었다.


분기별 성과 보고 회의가 열렸다. 리안의 큐레이션은 고객 만족도와 매출 기여도 면에서는 항상 최상위권이었지만, 큐레이션 종수와 목록 회전율에서는 최하점을 받았다. 강 팀장은 리안의 보고서 위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표정은 칭찬과 질책 사이에서 미묘하게 갈렸다.


“리안 씨의 방식이 고객 만족도와 브랜드 가치에 기여하는 건 모두 인정합니다. 그건 우리 서점의 자부심이죠.


강 팀장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본론으로 들어섰다.


“문제는 양입니다, 리안 씨, 탁월한 역량으로 매출을 견인해 주시는 건 높이 평가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양입니다. 당신의 오랜 노력 끝에 선별된 책이 한 분기에 고작 스무 권이라는 현실 말입니다. 그 스무 권이 매출 기여도 상위 10%에 들 정도로 불티나게 팔린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이 문제입니다. 리안 씨의 능력을 겨우 스무 권에만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리안은 팀장의 말에 곧장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방식을 옹호해야 한다는 내적 충동을 느꼈다.


“팀장님, 그 스무 권은......”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 스무 권이 왜 문제가 안 됩니까? 리안 씨의 모든 직관과 시간이 투입되었음에도 결과가 스무 권에 멈춰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리안 씨의 방식'이 가진 한계입니다. 리안 씨의 큐레이션 역량이 고작 20권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매일 수많은 선택을 기다리는 고객의 수요가 리안 씨의 속도에 맞춰 기약 없이 멈춰 서야 한다는 걸 알아야죠.”


리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 팀장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보고서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깊이가 희석되더라도, 리안 씨의 느림이 가진 힘을 더 많은 책에 투입해야 합니다. 서점의 규모에 맞는 리안 씨만의 효율을 만들어야죠. 다음 분기에는 큐레이션 종수를 최소 두 배로 늘려주세요. 이게 회사에서 리안 씨의 능력치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목표치입니다.”


리안은 팀장의 현실적인 날카로운 논리 앞에서, 쉽사리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리안의 인간적인 연결 방식이 검증된 성공 공식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대형 문고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요구하는 총량의 법칙에 자신의 느림이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리안은 팀장의 말이 서점의 셈법으로는 정답임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내면은 그 효율이라는 폭력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강 팀장은 리안에게 기존의 두 배인 분기당 40종이라는 과중한 짐을 지웠다. 하지만 이는 리안의 방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숫자였다. 40종을 '읽지 않고' 추천한다면, 그건 AI처럼 영혼 없는 기계로 돌아가라는 명령과 같았다. 리안은 잠시 머리칼을 단단히 고정한 거북 모양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리안은 서점 생활을 시작할 때 가슴에 품었던 신념을 침착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대변했다.


“팀장님, 최소 40종은 현행 제 큐레이션 기준을 유지하는 선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저는 책의 가치와 고객의 기대를 확인하는 데 시간을 투자합니다. 이 속도를 올리면 독자의 갈증을 읽어내는 진정성에서 나오는 신뢰가 훼손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책은 데이터에 근거한 기계적 추천일 뿐이며, 이는 곧 존재가치의 손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저는 저희 서점의 가치를 지키고 싶습니다.


회의실 공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강 팀장은 리안을 잠시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리안의 고집에 대한 약간의 짜증과 인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천천히 말했다.


“리안 씨, 그 가치라는 건, 우리가 돈을 벌기 때문에 지킬 수 있는 사치라는 걸 잊지 마세요. 리안 씨의 진정성이 고객의 신뢰를 얻는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신뢰를 100% 지키기 위해 회사 전체의 효율을 희생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회사에게 필요한 건 리안 씨의 인간적인 신뢰가 아니라, ‘인간적이지만 효율적인 리안’입니다. 그걸 증명하지 못한다면......


강 팀장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결국 그는 타협 대신 냉정한 현실을 제시했다.


“그래요. 리안 씨의 원칙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다음 분기에도 이대로라면, 우리는 리안 씨에게 성과급을 지급할 명분이 없습니다. 회사는 속도와 효율이라는 숫자로만 작동합니다.


리안은 머리에 꽂힌 거북 핀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아빠의 가르침과 회사의 냉정한 현실 사이에서, 리안은 자신이 서 있는 땅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리안은 그 회의에서 윤리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재정적인 보상과 직장 내 평가라는 현실적인 대가를 치렀다. 리안은 자신의 고집이 직장 내에서 얼마나 외로운 길인지 다시 한번 절감했다. 느림의 가치를 지키는 일은, 빠르고 가혹한 방식으로 리안의 통장 잔고와 인사고과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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