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의 고뇌는 읽지 않은 책에서 시작되었다. 하루 평균 170여 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리안이 모든 책을 완독하고 추천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북큐레이션은 소개 글, 서평, 목차 분석, 그리고 저자의 철학을 파고드는 깊이 있는 연구가 동반되어야 했다. 리안의 철학은 책을 읽지 않고 추천하는 것은 고객에게 정직하지 못한 기계적 행위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ARS 말투를 벗어난 리안이 극복해야 할 할 영혼을 잠식하는 은밀한 편의였다.
주말 저녁, 리안은 가현을 따라 작은 독서모임에 나갔다. 큐레이터 직무 전환 이후 처음으로 갖는 편안한 외부 활동이었다. 모임 참가자 중 한 명이 리안을 알아보고 마치 스마일리 캐릭터처럼 입을 활짝 벌리며 다가왔다.
"유리안 큐레이터님 맞으시죠? 이 자리에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주변의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를 뚫고 리안에게 깊은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며칠 전 추천받은 그 책이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그 자유조차 누군가의 눈으로 증명된다.'는 실존적 회의로 끝나는 것이 맞나요? 큐레이터님은 이 결론에 동의하시나요?"
리안은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원칙적으로 리안은 책 내용 전체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절대 추천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큐레이터였다. 하지만 회사가 요구하는 숨 막히는 신간 물량의 소화 속도와 효율성이라는 압박 앞에, 리안은 그 책을 '소재의 참신성과 시장 반응'만을 분석하여 추천 목록에 올리는 편법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리안에게 고객의 질문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책의 내용을 넘어, 사교 모임이라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리안이 그 책을 진심으로 읽었는지, 혹은 회사의 목표에 맞추기 위해 겉핥기로 포장했는지를 캐묻는 듯 한 날카로운 심문으로 여겨졌다.
리안은 솔직하게 책의 마지막 장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할 수 없었다. 리안은 간신히 저자의 성향과 서론을 바탕으로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이끌었지만, 등 뒤로 서늘한 죄책감의 강물이 흐르는 듯했다. 땀에 젖는 느낌이었다. 리안은 혹시라도 땀에 젖은 옷이 들키거나 얼굴의 긴장이 드러날까 싶어, 일부러 조명이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몸을 돌렸다. 리안은 그 어둠 속에서 간신히 호흡을 고르며, 더 이상 그 책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가시방석 같았던 모임이 마침내 끝난 후, 리안은 비로소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고객에게 느림의 가치를 선사하고 본질을 일깨우고자 했던 자신의 직업적 이상이, 읽지 않은 책의 무게 앞에서 빠른 죄의식으로 되돌아왔다. 리안이 이룬 성취감의 탑 아래에는 완벽하지 못한 죄책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리안은 적당한 변명으로 친구들과의 뒤풀이를 거절하고, 무언가에 쫓기듯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리안은 문제의 에세이집을 펼쳤다. 큐레이션 과정에서 표지 분석과 핵심 주제만으로 스쳐 지나갔던 그 책을, 리안은 마지막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리안의 눈은 오로지 마지막 장을 향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그 자유조차 누군가의 눈으로 증명된다." 고객의 날카로운 질문이 정확히 맞았음을 확인하는 순간, 리안의 가슴에 얹힌 죄책감은 깊은 심해에 드리워진 무쇠 닻처럼 리안의 숨통을 누르기 시작했다. 리안은 그제야 고객에게 거짓을 팔았음을, AI의 효율성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그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고객을 대했음을 깨달았다. 큐레이터라는 직함은 책을 읽지 않은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무거운 윤리적 왕관이었다.
리안은 밤새도록 처음부터 책을 읽었다. 창밖이 밝아올 때쯤, 리안은 잠 대신 깊은 성찰을 얻었다. 책의 무게는 활자의 무게가 아니라, 그 책이 고객의 삶에 미칠 영향이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리안은 서가연구실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리안은 이제 활자 속에 갇혀 있는 책의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책이 진정으로 필요했던 고객의 숨결과 삶의 맥락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모니터 불빛과 숫자로만 이루어진 활자 속에서 아무리 완벽하게 책을 파악해도, 그 책이 독자의 손에 쥐어졌을 때 어떤 의미로 번역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리안의 직업 철학은 단순히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책과 삶을 연결하는 견고한 닻이 되는 것이었다. 책을 읽지 않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해답은, 활자 너머의 삶이 펼쳐지는 곳, 즉 책이 살아 숨 쉬는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뒤로 리안에게는 '서가 순례'라는 남들과 다른 비공식 루틴이 생겼다.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할 때쯤, 리안은 현장 동향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서가로 내려왔다. 리안이 서가로 내려오는 것은 고객 동향을 살피는 행위를 넘어선 정신적인 재충전 의식에 가까웠다.
리안은 마치 책들이 가득 담긴 수족관을 살피는 도선사처럼, 고객들이 어떤 자세로 책을 잡는지, 어떤 표정으로 서가를 헤매는지 느릿하게 관찰했다. 이는 AI 지능형 추천 목록에는 없는, 인간의 미세한 떨림과 방황의 냄새를 맡는 행위였다. 리안이 서가에서 직접 고객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일상적인 업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객의 눈빛에서 과거의 자신처럼 절박한 방황을 읽어내는 순간, 리안의 가슴에는 자신만의 표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끓어오르는 열망이 은근히 고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