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독자의 내밀한 취향과 서점의 고유한 철학을 엮어내는 직조공으로서 기량을 쌓아가며 리안의 섬세한 통찰이 빛을 보려던 찰나, 시대의 조류처럼 AI 추천 시스템이 서점의 문턱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본래 임무 위로 데이터를 다루는 새로운 층위의 노동이 무겁게 배당되었다. 리안의 시간은 이제 책의 온기 대신, 차가운 모니터의 푸른 잔광아래 속절없이 포박되었다. 리안은 책을 매만지고 독자의 눈빛을 읽어내는 큐레이션 업무와, 활자 속의 사막과 같은 IBRS 보고서의 건조한 수치와 씨름하는 이중의 짐을 져야 했다. 인간의 섬세한 직관은 차트 속 직선과 중첩되었고, AI 알고리즘의 맹목적인 효율을 벼리는 데 리안의 역량이 무력하게 소진되었다. 이 건조하고 무감한 데이터의 수렁 속에서, 리안은 자신이 느림의 철학 대신 코드의 효율이라는 낯선 깃발 아래 영혼을 맡긴 것은 아닌지 깊은 회의 속으로 침잠했다.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닳아 없어지는가? 리안은 차가운 푸른 화면 속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무실 공기는 건조하고 피로는 짙어, 리안의 머리를 짓눌렀다. 리안은 더 이상 숫자와 효율의 언어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았다. 숨 막히는 사무실의 냉정한 효율성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리안의 마음은 이미 현장인 C5 구역으로 가 있었다. 그것은 리안의 작은 일탈이자, 거북 수족관의 느리고 리듬감 있는 물소리가 주는 위안을 찾아가는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리안은 C5 구역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리안은 평소 고객들의 표정, 걸음걸이, 그리고 그들이 무엇에 머무르지를 습득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리안에게 서점은 책과 사람의 욕망이 얽혀 돌아가는 거대한 미로였고, 리안은 그 미로 속에서 미세한 이상 징후도 놓치지 않는 예민한 ‘관찰자’였다.
리안이 미로 속에서 무언가 평소와 다른 비틀림을 찾고 있을 때였다. 리안은 문학 코너를 지나치기 직전, E구역의 과학·기술 서적 코너 앞에서 익숙한 유형의 고객을 발견했다. 유명 건축 회사의 중견 설계사였다. 리안은 그를 즉각 알아보았다. 며칠 전 새로 입고된 전문 건축 잡지의 표지에서 본 얼굴이었고, 리안이 그의 이름이 박힌 저서를 재고 파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그는 도시 효율과 기능주의 건축의 대가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새 프로젝트를 앞두고 콘크리트의 새로운 활용법이나 친환경 건축 기술 동향 같은 전문 서적만 훑고 있었다. 리안은 그가 지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갇혀 질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안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설계사는 리안의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리안이 입은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 위에 걸쳐진 옅은 베이지색 조끼와 가슴팍에 작게 새겨진 k문고의 상호를 확인하고서야 직원임을 인지했다. 동시에 리안의 머리 한쪽에 꽂혀 있는 거북 모양의 작은 금속 핀을 발견했다. 자신의 전문 영역에 느닷없이 침범해 들어온 이 직원이 대체 누구인지, 심지어 이 거북 핀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건축과 관련된 책 외에, 조금 더 시간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실 만한 책은 어떠실까요?”
리안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설계사의 불편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북큐레이터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찾는 건 당장 프로젝트에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술 자료입니다. 뜬구름 잡는 인문학 서적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시간이 곧 비용이라는 도시인의 피로와 냉철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리안은 그의 눈빛에서 콘크리트의 새로운 활용법'을 찾지만 정작 시간의 흐름을 놓치고 있는 공허함을 읽었다. 리안은 설계사의 시선 끝,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리안이 직접 기획하여 배치해 둔 '시대의 교차로' 추천 서가로 몸을 돌렸다. 그곳은 리안이 효율 중심의 기술 서적과 느림의 인문학을 연결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코너였다. 리안은 서가 구석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과 영속성을 다룬 인문서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책은 기술이 아닌, 건축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보세요.”
리안의 집요한 시선 앞에서 설계사는 더 이상의 반박을 포기한 듯했다. 그는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한 번 떼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리안이 건넨 책의 낡은 표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지만, 이미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책장을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낯선 세계로의 초대에 대한 불안과 함께, 현재 자신이 갇힌 효율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은 갈망이 발동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결국 그날 밤, 리안이 건넨 낡은 표지의 책을 펼쳤다.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설계와 콘크리트가 아닌 점토로 만든 건축물의 영속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단단한 구조물 안에 갇힌 자신의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사고는 며칠 밤 동안 이 태고의 흐름을 따라가며 점차 이완되었다. 일주일 후, 설계사는 다시 리안을 찾아왔다. 그는 책을 덮자마자 “단단한 구조물 안에 사람의 숨결을 담는 방법을 다시 배웠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그 책을 세 권 더 주문해 팀원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리안의 추천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삶의 철학에 의문을 던졌고, 데이터가 아닌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게 만들었다.
성공은 곧 새로운 형태의 소진을 의미했다. 리안의 근무 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큐레이팅 업무는 퇴근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밤늦도록 모니터 불빛 아래에서 온라인 서점의 알고리즘과 자신의 직관을 싸움 붙이는 것은, 허리를 굽혀 책을 꽂는 노동과는 차원이 다른 피로였다.
육체의 통증은 사라졌지만, 이제 눈꺼풀은 무거운 납덩이 같았고, 머릿속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돌아가는 복잡한 톱니바퀴처럼 느껴졌다. 리안은 창밖의 밤하늘의 고요함과, 책 속에 담긴 영원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정신을 소모하는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무대는 성취와 고요한 자기희생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리안이 북큐레이터로 직무를 전환한 후에도 가현은 여전히 리안에게 유쾌한 비공식 거울이었다. 어느 날, 리안은 오랜만에 가현과 서점 근처의 작은 국숫집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수 그릇 앞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필연적으로 일에 대한 하소연으로 흘러갔다.
“야, 나는 네가 정말 부러워.”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던 가현이 리안을 향해 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가현은 여전히 고객 응대와 물류 정리라는 육체의 리듬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네 종아리 핏줄 보고 ‘아이쿠, 어떡해’ 했었는데, 이제 네 종아리는 멀쩡해졌잖아. 그 대신 네 눈 아래가 거무튀튀해졌지. 발로 뛰는 일에서 머리로 생각하는 일로 바뀐 것뿐인데, 너는 왜 더 바빠 보여?”
가현의 직설적인 질문에 리안은 순간 뜨거운 국물을 삼키다 헛기침을 했다. 가현의 지적은 정확했다. 정중앙의 과녁에 꽂힌 화살촉처럼, 피할 틈 없이 모든 논점의 핵심에 박혔다.
리안의 육체적인 고통은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AI 시대에 인간의 가치를 지키려 자처한 정신의 덫, 곧 본질을 향한 끝없는 사유의 형벌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발은 편해졌는데, 머리가 퇴근을 안 한다고 해야 하나.”
리안은 국물만 휘저었다. 예전엔 육체노동이 끝나면 일과 사생활이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서점 문이 닫히면 리안의 몸은 고단함으로 침묵했지만, 지금의 정신노동은 밤새도록 리안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추천 목록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큐레이터의 숙명이라고 리안은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다. 가현은 그런 리안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국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책과 영혼을 나누는 일을 하고 싶다. 근데 리안아. 너는 행복하니?”
가현의 질문은 뜨거운 국수처럼 리안의 목구멍을 따끔하게 만들었다. 리안은 성취감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행복’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