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고는 ‘지능형 도서 추천 시스템(IBRS, Intelligent Book Recommendation System)’이라는 이름의 AI 파일럿 프로그램을 실험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인간 큐레이터의 직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리안을 포함한 직원들은 모니터 구석에 희미하게 뜨는 ‘평균 고객 구매 전환율 1.3%’나 ‘핵심 키워드 연관성 지수 62점’ 같은 숫자를 그저 흥미로운 통계 자료 정도로 여겼다. 아무도 그 차가운 알고리즘이 훗날 자신들의 자리를 대체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모두가 속도의 효율을 맹신하는 시대였으나, 리안은 여전히 자신이 가진 인간적인 느림과 연결의 힘이 서점의 유일한 방패막임을 믿었다.
실제로 그 방패막이 리안 자신과 고객을 지켜냈던 순간이 있었다. 한 번은 텅 빈 눈으로 들어와 최신 자기계발서 코너만 맴돌던 한 중년 여성이 있었다. 여인의 눈빛은 “잘 사는 법”이라는 번갯불 같은 정답을 간절히 원했지만, 리안은 그 단기적인 정답 대신 구석에 먼지처럼 꽂혀 있던《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라는 제목의 작은 시집을 권했다.
리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치 운명의 갈림길을 지켜보듯 여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리안은 습관처럼 머리칼을 단단히 고정한 작은 거북 모양의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온화한 바람이 여인의 방황하는 마음에 단단한 닻처럼 닿기를 바라면서.
여인은 길게 망설였다. 그녀의 손은 베스트셀러 코너의 번쩍이는 자기계발서를 향했지만, 시선은 리안이 권한 낡은 시집에 미동 없이 머물렀다. 리안은 일말의 희망을 보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듯 한 침묵이 지배했다. 리안은 자신의 안목이 이 서점에서 비로소 피어나는지, 아니면 차갑게 버려지는지 숨죽이며 운명의 결정을 기다렸다.
마침내, 여인은 시집을 집어 들었다. 그 시집은 서점의 속도와 효율이라는 셈법으로는 느리고 효율 없는 물건이었으나, 여인은 그것을 마치 오랜 방황 끝에 발견한 단단하고 무거운 약속처럼 두 손으로 품에 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리안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길을 찾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희미하고 따뜻한 안도감을 읽어냈다. 리안의 느린 연결이 빠른 효율을 이겨낸, 고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리안은 그때 비로소 자신이 이 서점에 존재하는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중년 여성이 계산을 마치고 떠난 지 며칠 후, 우편함에 편지가 도착했다. 리안은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대신 무거운 종이 위를 누른 글씨를 보고, 이 편지가 여인의 온전하고 깊은 진심임을 직감했다. 편지봉투에는 '거북 핀을 꽂은 사서님께'라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사서님이 내게 준 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인생을 건져 올릴 밧줄이었습니다. 나는 모두가 효율을 외치는 세상에서 길을 잃었지만, 당신의 따스한 시선이 나를 발견해 주었어요.”
리안은 그때 깨달았다. 자신의 일은 매출을 올리는 효율적인 연결이 아니라, 상실과 고통 속에 갇힌 단 하나의 영혼에게 가닿는 조용한 구원임을. 느림의 철학은 그렇게 거듭났다. 리안의 영혼은, 이 서가를 떠나지 않는 한 자신이 영원히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시집 사건 이후, 리안은 자신의 인간적인 통찰이 가진 힘을 확신했다. 더 이상 책을 꽂는 기계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손에 익은 서가 정리와 익숙해진 직무가 주는 평온함은 어느덧 리안의 발목을 묶는, 달콤하지만 묵직한 족쇄처럼 느껴졌다.
며칠을 망설이던 리안은 결국 용기를 내어 서가 관리 업무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북큐레이터 직무 전환을 신청했다.
“야, 리안! 진짜 할 거야, 북큐레이터? 너 그 자리 가면 독서량 경쟁에, 판매 실적 스트레스 엄청난 거 알잖아.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서가에 파묻혀 지내는 게 낫지 않아?”
오랫동안 리안과 함께 서가를 관리했던 동료 가현이 걱정 반, 의아함 반의 표정으로 물었다.
“가현아, 나는 책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고 싶어. 나에게 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야. 내 속도가 여기선 무의미해.”
리안은 더 깊은 설명을 망설였다. 자신의 느림의 철학을 동료에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비효율적인 낭비처럼 느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리안은 직무전환 신청서에 단순한 자기소개 대신, 시집 사건을 비롯해 평소 자신이 고객과 책 사이에서 경험했던 아날로그적 감응의 실제 사례들을 빼곡히 적어냈다. 리안의 제안은 판매 수치가 아닌 독자의 삶에 미치는 울림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큐레이터 자리는 단 세 자리뿐이었고, 내부 경쟁은 치열했다. 경쟁자들은 마케팅 전략과 최신 독서 트렌드 데이터를 근거로 자신의 역량을 피력했다. 리안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비현실적인 후보일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안은 데이터 대신 고객의 진정한 요구를 찾아내는 남다른 통찰력을 내세웠고, 이는 책의 본질적 가치를 잃지 않으려 했던 관리자들에게 묘한 설득력을 얻었다. 리안의 진정성과 깊이 있는 철학은 결국 조직의 냉정한 효율성 평가를 통과시켰고, 리안은 마침내 간절히 바라던 정식 북큐레이터가 되었다.
원하는 직무를 얻은 기쁨도 잠시, 곧 보이지 않는 수많은 활자의 무게가 리안의 어깨를 짓눌렀다. 리안은 이제 발바닥과 종아리의 통증 대신, 단 하나의 영감을 찾아내는 고독한 작업을 위해 인고의 시간을 벼리며 내면의 서고를 채워야 했다. 그 일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고독하고도 숭고한 노동이었다.
퇴근 후에도 리안의 시간은 고독한 연구로 채워졌다. 리안은 온라인 서점의 빅데이터 추천 목록과 판매 동향을 분석하면서도, 인간의 욕망과 시대의 결핍을 파고드는 깊은 독서를 병행했다. 어떤 책을, 어떤 타이밍에, 어떤 고객에게 연결할지 고민하는 일은 밤늦도록 리안을 잠 못 들게 했다.
고객들은 리안의 섬세하게 심연을 파고드는 추천에 화답했다. 대학 시절, 리안의 종이 책갈피처럼 자신만의 표식을 읽어내듯 리안은 고객들의 막연한 질문 뒤에 숨겨진 진짜 필요를 찾아냈다. 리안의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 리안이 큐레이션한 책들은 서점 매출에 실질적으로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리안은 서점의 셈법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증명되고 있다는 성취감에 은은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 희열도 잠시, 리안의 섬세한 직관과 고독한 노동을 비효율적인 낭비로 치부할 차가운 변화가 이미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k문고가 ‘미래 서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명분 아래, AI 추천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