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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20화

무저갱

by 오프리

리안은 무거운 짐처럼 휴가의 침묵을 짊어진 채 출근했다. 회사 건물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리안은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음을 감지했다. 리안을 짓눌렀던 무형의 압박감이 이제는 차가운 대리석처럼 단단한 현실이 되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이전보다 훨씬 고요했다. 휴가 전까지 리안의 양 옆을 지키던 두 큐레이터의 책상은 흔적도 없이 비워져 있었다. 출근 시간임에도 책상 위로 드리워진 허전한 그림자가 사무실의 고요함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남아있는 직원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가방을 정리하는 등의 일상적인 움직임 속에서도, 각자 모니터 속 데이터에 파묻혀 있었다.

푸른 바다거북들이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던 C5구역엔, 여전히 거대한 AI 마케팅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손가락을 하느님에게 향한 로봇의 손은 마치 데이터의 창조주인 듯 속도를 높이라고 명하는 듯했다.

리안이 멍하니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소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리안에게 다가왔다. 소민의 얼굴에 걱정이 역력했다.


“리안아, 너 얼굴 너무 핼쑥하다. 휴가는 잘 보냈어? 아니, 휴가 잘 보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소민은 말을 흐렸다.


“괜찮아요.”


리안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소민은 리안의 눈빛에서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공허함을 읽어냈다.


“리안아, 지금은 AI가 대세가 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세상은 계속 변하잖아. 너까지 이렇게 주저앉으면 안 돼. 부장님이 제안한 마케팅전략팀도 한번 생각해 보지 그래? 너의 그 통찰력이면 거기서도 잘할 수 있어.


소민이 간절한 마음으로 리안을 회유했지만, 리안의 시선은 AI 포스터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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