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멍, 어멍……. 나 와수다.” *
집에 도착한 리안이 영숙을 연이어 불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낮잠을 자던 토종견 흑구가 날렵하게 좌우로 뛰어다니며 리안을 반겼다. 리안은 현재의 리모델링된 집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 친구들에게 남루한 전통 구옥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영숙을 졸라 리모델링을 강행했던 일. 그것은 아빠의 상실 이후 집안에 드리워진 슬픔의 그림자를 시류라는 허식으로 가리려 했던 리안의 철없던 마음이었다.
“폴리, 어멍은 어디 감시면 니 혼자 인?” **
폴리는 맨송맨송 눈만 껌벅이며 혀를 길게 내밀었다. 리안이 영숙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집이라 해봐야 영숙만이 홀로 지키는 고작 17평짜리 작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리안은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이 집에 본능적이고 각별한 애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거리의 파란 기와지붕을 받치고 있는 매끈하게 평평한 벽, 불투명 반창으로 된 연주황 현관문, 좌측 안방의 이중창으로 된 반창 세시, 우측 작은방의 반창 통유리 문으로 된 현재 집 모습은 리모델링 전에는 제주의 전통 구옥이었다. 흙에 굵은 자갈을 섞어 올린 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안거리는 열 때마다 끼익 하며 마찰음을 내는 검정 새시가 귀에 거슬렸다.
모거리는 부엌으로 쓰였고 밖거리는 각종 짐이나 물건들을 보관하여 사람 손이 오래도록 타지 않던 장소였다.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겨울 방학 때까지 리안은 틈만 나면 영숙을 졸라 전통 가옥을 리모델링하자고 보챘다. 차일피일 미루는 영숙의 미지근한 반응에 리안은 급기야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집을 고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기숙사에 계속 머문 채로 집에 내려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래도 영숙은 조금만 기다리라면서도 끝내 확답을 하지 않았다. 리안은 이듬해 대학 개강 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영숙에게 전화하던 루틴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았다. 하루 만에 영숙에게 연락이 왔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도 읽지 않았다. 그 뒤로 이틀에 한 번 꼴로 전화가 왔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영숙도 지쳤는지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2주째가 지나던 어느 날 저녁 또 전화가 왔다. 평소에 세 번 전화하다 안 받으면 멈추던 영숙이 다섯 번째 계속 전화를 하자 리안은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전화를 받았다.
“무사?” ***
“무사 전화 안 받난? 니는 경 하면은 속이 펜안하니? 말란 어멍 걱정도 안뒈난? 뒛저, 버금달에 집 고찌기로 하엿저. 게고 네가 시집갈 돈은 한 푼도 줄 수 것으난 앞더렌 네가 마련하여사 한다. 게난 이제 전화 하썰 받아. 알아져?” ****
드디어 영숙이 고집을 꺾고 집을 고치겠다는 말에 리안이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시집갈 돈은 이미 꼬박꼬박 저축을 하고 있으니 이제 집만 잘 수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 해 5월이 끝나갈 무렵 영숙이 리안에게 리모델링 후에 찍은 사진 석장을 보냈다. 하나같이 엉성하고 삐뚤삐뚤하며 화질이 나빴지만 리안은 대충 어떤 그림인지 감을 잡았다. 리안은 제주에 오겠다는 대학 친구들에게 남루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된 친구들의 성화를 리안은 거절하기 어려웠었다. 리안은 철없던 지난날 영숙에게 모질었던 자신의 모습이 집에만 오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영숙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모가 리안에게 전화해서 ‘엄마에게 신경 좀 쓰라’고 했던 2년 전 여름이었다. 이모는 제주 집에 이틀간 영숙과 머물렀었는데 ‘한동안 집안 청소를 안 한 건지 도무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다’며 빨랫감이 2주일째 방치되는 건 물론이고 개밥도 안 줘서 비쩍 말라 죽을 뻔했다고 했다. 얼굴은 촉기 하나 없고 말은 어눌해지고 자꾸만 살기 싫다는 말만 반복한다는 거였다. 리안이 즉시 집으로 내려가 겨우 영숙을 설득해서 정신과 병원에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게 했다. 매일 한 번씩 전화로 안부도 물었고 주에 한 번은 영상 통화로 영숙의 안색을 살폈다. 리안은 힘든 밭 일 말고 영숙이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시골에서 농사 말고 딱히 할 만한 건 없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예전보다는 영숙의 마음 어딘가 한쪽이 기울어졌다는 감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다.
리안은 밀려드는 과거의 그림자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리안은 그 묵직한 회상의 꼬리를 끊어내려 애쓰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리안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한낮의 햇살은 이미 부드러운 초저녁의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리안은 작은 방에 짐을 놓고 귤차를 한 잔 마시며 영숙을 기다렸다.
* “엄마, 엄마…. 나 왔어.”
** “폴리야, 엄마는 어디 갔는데 너 혼자 있니?”
*** “왜?”
**** “왜 전화 안 받니? 너는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니? 도대체 엄마 걱정도 안 되니? 됐어, 다음 달에 집 고치기로 했어. 그리고 네가 시집갈 돈은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앞으론 네가 마련해야 한다. 그러니 이제 전화 바로 받아. 알았지?”
붉은 태양이 노을 진 수평선 위로 한 뼘쯤 고개를 내밀고 있을 때, 잠이 든 리안을 깨운 건 친숙하고 구성진 영숙의 목소리였다.
“리안아, 일어나보라.”
“어멍, 어디 갓당 이제사 오란?” *
“생선가게의서 우리 리안이 좋아하는 각재기 네 드룹 사오란. 곱닥한 얼굴이 이거 머냐? 밥은 안 걸르고 보내준 반찬은 잘 먹고 인?” **
검게 그을린 마른 두 손으로 리안의 얼굴을 매만지며 속사포로 쏟아내는 영숙의 목소리가 리안에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잔소리처럼 들렸다.
“걱정맙서, 똑똑 잘 먹엄서. 메칠 동안 어멍이 하준 밥 잘 먹고 나민 살 하꼼 지겟주게 뭐.” ***
리안이 갓 끓여낸 된장 국물에 잘 우려진 몽실몽실한 각재기 살 한 점을 떼자 허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비린내 하나 없이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청양고추의 매콤함과 무와 된장의 단맛이 한데 어우러진 국물이 리안의 허기진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갔다. 시큼하게 익은 깍두기와 밭에서 갓 따온 풋고추 그리고 묵은 깻잎이 반찬의 전부였지만 리안은 영숙이 손수 차려준 저녁상을 깔끔하게 비웠다. 리안이 이제야 살 것 같다며 역시 집밥이 최고, 그중에서 영숙의 각재기국이 최고 중의 최고라며 ‘엄지 척 세리머니’를 날렸다. 영숙은 리안이 이제 살맛 나나 보다며 마른 입을 히죽거리면서 배고프면 육전도 해줄 테니 언제든 말하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영숙이 리안에게 가만히 쉬라며 설거지를 하려고 하자 리안은 주방 자리를 차지하려고 영숙과 실랑이를 했다. 리안이 기어코 자리를 차지하곤 설거지뿐만 아니라 집 안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리안은 영숙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귤차를 마시는 내내, 따뜻한 귤차 잔만 매만졌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가슴에 품었던 무거운 말을, 이 평화로운 공간에서 어떻게 풀어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리안이 그토록 원했던 북큐레이터가 되었을 때, '우리 딸이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했던 영숙의 벅찬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 목소리가 리안의 혀끝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거짓된 안녕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귤차를 마시며 적당한 타이밍을 살피던 리안은, 결국 심호흡과 함께 단도를 꺼내듯 말을 꺼내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편 영숙은 리안의 결연한 표정보다도, 리안이 머리 한쪽에 꽂고 있던 익숙한 거북이 모양의 청색 핀이 사라졌음을 먼저 알아차렸다. 리안은 서점 일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그 핀을 떼놓은 적이 없었다. 영숙은 리안이 핀을 떼고 온 것도, 평소보다 훨씬 짙게 드리워진 리안의 눈 밑 그림자도 이미 넌지시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영숙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저 귤차 잔을 내려놓으며, 리안이 힘겹게 꺼낼 말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리안은 빅데이터, 컴퓨팅 파워, 머신러닝, 딥러닝 등 전문 용어를 쏟아내며 '인공지능이 책을 추천하니 자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복잡한 이유를 영숙에게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너무 어렵잖아. 엄마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어. 에라, 모르겠다…….’ 설명을 이어가던 리안은 스스로의 설명에 난감함을 느끼며 말끝을 흐리자, 영숙이 리안 대신 마무리를 지었다. 넷플릭스처럼 이젠 사람들이 읽을 책도 컴퓨터가 대신 추천해 준다는 거 아니냐며 영숙이 단박에 리안의 허를 찌른 것이다. 리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떻게 그걸 알았냐며 비시시한 웃음이 터져 나오더니, 그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와락 소리 내어 웃음을 쏟아냈다.
영숙은 최근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를 줄줄 꾀고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연달아 다섯 편의 제목을 오탈자 하나 없이 정확하게 짚어냈다. 리안이 영숙의 우울증 해소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작년 봄에 인터넷 TV로 설치해 드렸지만, 평소 드라마보다는 라디오를 즐겨 듣던 영숙이 이렇게까지 열렬한 시청자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영숙은 딸보다 티브이가 자기 취향을 더 잘 안다며 자신이 가장 재밌게 본 <디어 마이 프렌즈>를 꼭 보라고 강권하기까지 했다.
리안 자신은 이제 길 잃은 기러기 처지가 되었는데, 영숙은 쉽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씁쓸한 헛헛한 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헛헛함 속에서 리안은 차라리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진짜 본론이 남았음을 리안이 상기한 것이다. 리안은 결연하지만 나긋한 목소리로, 지난 10여 년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 집으로 돌아와 영숙과 함께 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영숙은 그 말을 듣고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듯 영숙은 느긋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지난 한 주 동안 리안의 목소리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며 딸의 결심을 담담하게 납득하는 것이었다. 영숙은 딸에게 대뜸 시집갈 돈은 마련했냐고 물었다. 리안은 영숙이 허락했다는 사실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제주엔 조그만 책방 여쭐 돈은 있수다. 시집갈 돈은 나가 벌어 모을 거난, 어멍은 걱정 허지 마씸!" ****
리안은 어쩐지 모르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렌 허민 됐주게. 천천히 맘 정리 잘 허고 내려오쿠다." *****
영숙은 딸을 깊이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영숙의 따뜻한 품 안에서, 고통스러웠던 치유와 회복의 여정이 단단한 흙을 밀어 올리는 새싹의 미약한 떨림처럼 움터 올랐다.
* "엄마,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예요?"
** "생선 가게에서 우리 리안이 좋아하는 전갱이를 네 두름 사 왔지. "고운 얼굴이 이게 뭐니?" 끼니는 거르지 않고, 보내준 반찬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 "걱정 마세요, 아주 잘 먹고 있어요. 며칠 동안 엄마가 해 준 밥 잘 먹고 나면 살이 조금 찌겠죠, 뭐."
**** "제주에는 조그만 책방을 열 돈은 있어요. 시집갈 돈은 제가 벌어서 모을 거니까, 엄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 "그렇게 하면 됐지. 천천히 마음 정리 잘하고 내려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