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리안은 k문고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시내 골목 깊숙이 후미진 곳에 자리한 작은 헌책방으로 향했다. 이곳은 거대 서점의 그림자에 갇혀 있으면서도 망하지 않고 용하게도 생존해 온 곳이었다. 리안은 북큐레이터로 일하며 효율과 경쟁 속에 파묻혔을 때조차, '저 작은 서점은 대체 무슨 수로 버티는 걸까'를 늘 궁금해하며 이 낡고 묵은 은식처를 종종 찾곤 했다. 이곳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다.
헌책방 주인은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늘 책더미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낡은 조끼 위와 오래된 돋보기 위에는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아 있었다. 리안은 그를 속으로 '먼지 선생‘이라 불렀다. 서점 가득 쌓인 먼지는 세월의 증거이자, 청소와 효율을 거부하고 오직 책의 본질만을 지킨 고집의 상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손은 수많은 종이의 결에 마모되어, 닳고 닳은 시간의 연보처럼 느껴졌다.
‘먼지 선생’ 할아버지는 리안을 알아보았지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리안은 먼지 냄새와 종이의 묵직한 세월이 뒤섞인 좁은 서가 사이를 거닐었다. 시간의 더께는 공간의 경계를 허물었고, 리안은 발의 감각이 아닌 기억의 결을 따라 서가를 걷는 듯했다. 리안은 아빠의 책장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제본의 낡은 책을 발견했다. 책을 펼치자 오래된 장다리꽃 잎처럼 갈색으로 변한 얇은 편지지 한 장이 떨어져 나왔다. 편지지에는 종이의 섬유질을 갈라놓은 듯 한 펜촉의 흔적이, 연갈색으로 변한 종이 위에서 흐릿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속도의 끝은 소멸, 느림의 끝은 영속.”
리안은 그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단 한 줄에 불과했지만, 그 문구는 리안의 사유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리안은 오랜 시간 해답 없는 진실의 무게 속에서 침묵했다. 리안의 시선은 헌책방의 먼지 낀 유리창 너머의 바쁜 도시 풍경에 닿았다. 서둘러 달려가는 사람들,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는 수많은 효율... 리안은 그 모든 것들을 시간을 가두는 흑백 필름으로 보는 듯했다.
소멸과 영속, 리안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진정성은 과연 어느 편에 서 있었던가.
한동안 꼼짝 않고 서있던 리안은 마침내 심장이 울리는 듯 한 조용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데이터와 효율이 아무리 시간을 압축하려 해도, 인간의 본질과 진정성은 그 영속의 시간에 기대어 비로소 존재 가치를 얻는다는 것을.
속도는 흔적을 지우고, 느림은 존재를 새긴다. 그것은 리안이 오래된 문장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삶에 비추어 다시 써 내려간 문장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마지막 확인이었다.
리안은 오랜 숙제를 마친 사람처럼 그 책을 계산하고 헌책방을 나섰다. 초저녁, 서울의 햇살이 되돌아 선 리안의 등허리를 비췄다. 리안은 오랜 숙제를 마친 사람처럼 그 책을 계산하고 헌책방을 나섰다. 초저녁, 서울의 햇살이 되돌아 선 리안의 등허리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