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김포공항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제주로 떠날 비행기만이 리안의 시야에 가득 찼다. 리안은 머리에 꽂은 짙은 청색의 거북 핀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리안은 ‘괜찮아, 잘 해낼 수 있어. 나는 나만의 속도를 지킬 거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무언의 다짐을 했다. 그 미소는 두려움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항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륙 후, 리안은 창밖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서울의 빌딩 숲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곳. 속도의 끝은 소멸이라는 메모의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리안은 극도의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도시를 떠나 영속의 바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눈을 감자, 은둔의 책갈피 목소리와 아이리스 폴의 필체가 리안의 선택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 리안은 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스물아홉, 모든 것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여자의 어깨 위로 시류에 밀린 낙오자라는 자책감, 그리고 새로운 시작 앞에 마주한 마음의 부담감이 짙은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억눌렸던 운명의 짐을 내려놓은 안도와 해방감이 가느다랗게 숨 쉬고 있었다.
집 문 앞까지 도착한 리안은 피로와 상실감을 감추려 했으나 결국 가려지지 못한 옅은 그늘이 드리워진 눈매가 리안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굳게 다문 입술은 마지막 자존심처럼 보였고, 복잡한 감정들이 내안에서 소금물처럼 눅눅하게 뒤섞여 있었다. 마치 긴 싸움을 끝내고 돌아온 병사처럼, 그녀의 온몸에서는 힘겨웠던 서울 생활의 피로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듯했다.
리안의 코끝에 희미하게, 그리고 반갑게 익숙한 냄새가 닿았다. 갓 지은 밥의 구수한 김과 막 끓이기 시작한 해물 된장찌개의 깊은 내음이었다. 피로와 패배감으로 잔뜩 웅크렸던 리안의 내면이, 그 냄새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졌다. 서울에서는 맡을 수 없던 살아있는 삶의 냄새. 그 순간, 허옇게 피어오르는 김처럼 가슴속 잠자던 기운이 솟아올랐다.
“어멍!” *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영숙은 익숙한 딸의 목소리에 순간 얼굴 가득 화색이 돌았다.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벅차올랐다. 이젠 정말 왔구나, 묵은 흙을 뒤엎듯, 찌개를 젓던 국자를 내려놓고 단숨에 마당으로 나왔다. 영숙은 그제야 딸의 축 처진 어깨와 억지로 펴고 선 듯 한 낯선 행색을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영숙은 긴 말 대신 제주 밭의 검은흙처럼 묵직하고 든든한 침묵으로 다가섰다. 영숙은 딸이 끌고 온 단출한 캐리어를 바라보는 대신, 작은 짐을 끌어안듯 리안의 몸을 통째로 품에 안았다.
“고생해수다. 우리 딸.” **
거친 바람과 햇볕에 단련된 제주 밭일꾼의 손마디처럼 단단한 영숙의 품 안에서, 리안의 눈에서는 끝내 터져 나오지 않으려 했던 뜨거운 물기가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안은 며칠간 짐 정리와 집 안팎의 소소한 변화를 살피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서 가져온 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효율과 성공을 상징했던 물건들은 대부분 버려졌고, 남은 것은 책과 노트, 그리고 몇 벌의 정장뿐이었다. 그때서야 리안은 서울에서 배편으로 먼저 내려 보냈던 거북이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거북이 세 자매는 비행기 반입이 안 되어 수일 전에 배편으로 이동해 이미 제주에 도착해 있었다.
리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거북이들을 방생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애초에 전 세계로 널리 퍼지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갇힌 곳이 아닌, 광활한 바다에서.
리안과 영숙은 거북이들을 데리고 중문 색달리 해변으로 갔다. 썰물이 빠져나간 모래톱은 다 마르지 않은 짠 기운을 머금고 축축했다. 두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방생의 의식을 치렀다. 리안은 묵언으로 세 자매의 자유로운 항해를 축원했고, 영숙은 두 손을 모아 거북이들이 오래도록 딸을 보살펴 주길 빌었다. 리안의 손길이 닿자, 거북이 세 자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능적으로 바람이 이끄는 바다를 향해 기어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거북이의 등딱지는 서울에서의 고단했던 시간을 짊어진 리안의 지난날처럼 무겁고 힘겹게 느껴졌다. 거북이 세 자매는 어느새 썰물의 하얀 포말에 닿는가 싶더니 금세 해수면에 둥둥 떠올랐다. 뭍에서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벗어던진 듯, 물을 만난 거북이 세 자매는 한결 몸이 가벼워 보였다.
살랑대는 바람이 파도 위의 거북이 세 자매를 경쾌하게 춤추게 했다.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거북이 세 자매는 느리지만 단호한 움직임으로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저 멀리 붉은 금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수평선을 향해 차츰차츰, 그러나 멈추지 않고 멀어져 갔다.
* “엄마!”
** “고생했다.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