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거북서점 28화

거북서점

by 오프리

리안은 단순히 책을 파는 것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한정하지 않았다. 리안의 소명은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대형 서점 인문학 구역 한가운데에 상징적인 거북 수족관을 통해 고요하게 가꾸려 했던 ‘느림의 미학’이었다. 정보는 빛의 속도로 소비되었고, 사람들은 다음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눈을 깜박일 새도 없었다. 리안은 그 거대한 흐름의 끊임없는 연결 속에서 인간의 사유 영역이 빠르게 침식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모두가 가속을 외치는 디지털 과잉 시대에, 역설적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컴퓨터가 멈춘 뒤에도 계속될 수 있는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리안은 거북이의 묵직하고 꾸준한 움직임이 바로 변치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고 믿었다. 거북이의 긴 생명력처럼, 리안의 서점 또한 인류와 함께 오래도록 생존을 이어가며 지속가능한 사유의 공간이 되길 바랐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힘과 삶의 의미를 통찰하는 지속되는 충만함,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을 이곳 제주에서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리안은 영숙에게 거북 수족관을 만들 때의 벅찬 감동과, 서점 손님들이 거북이를 보며 발길을 멈추고 고요해지던 표정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수족관의 고리 모양 물길과 쉼터 앞에 펼쳐진 책 모양 조형물 등, 자신이 얼마나 그 공간에 진심이었는지, 그곳이 단순히 책방이 아니라 생존의 염원을 담은 상징임을 영숙에게 은연중에 전달하려 했다.

리안은 거북이 세 자매가 남기고 간 빈 아크릴 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영숙에게 조심스럽게 서점 이름을 제안했다.


“어멍, 책방 이름 거북서점허멍 허주게. 어떵 헌디?” *


리안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영숙의 얼굴에는 이해하려 애쓰는 미소와 묵혀둔 생존의 두려움이 교차했다. 하지만 거북서점이라는 희미한 발음에 미소가 걷히고, 파도처럼 덮쳐오는 과거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니가 말허는 그 좋덴 허는 가치가 우리 밥까지 먹여줄 거 감수과?” **


영숙의 목소리는 서늘하도록 날카로웠다.


“니 아방 잃으코 평생 이를 악짝허멍 살아온 너 어멍이, 느까지 그 고생을 또 하는 걸 볼 거 닮아 무섭수다. 느림허는 거, 가난한 심들이 택허는 여유 없는 말뿐인 거 닮주게, 리안아. ***


어멍이 진정 두려워허는 건 느림이 아니주게, 상실이주. 이젠 도망 안 허고 이 느린 데서 잘 견디멍 보여줄 거우다. 어멍 남은 삶, 나가 책임질 거라게.” ****


리안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영숙은 손안의 작은 거북 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닳고 닳은 핀에서, 딸이 홀로 서울에서 감당했을 고독과 치열한 싸움의 시간이 느껴졌다. 영숙은 그 핀을 꼭 쥐며,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영숙은 리안의 좀처럼 변치 않는 끈기 속에 숨겨진 오랜 신념을 비로소 인정했다. 영숙의 눈에 비친 리안의 모습은, 아홉 살의 슬픔을 짊어지고 서울로 도망치듯 떠났던 과거의 소녀가 아니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낸, 성숙하고도 빛나는 어른이었다.


그라민 거북서점, 니가 젤 잘 비젼 허멍 있을 이름이구나 허우다. *****


영숙은 옅은 미소와 함께 그 이름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리안은 자신의 서점 철학이 어머니의 깊은 공감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가족의 치유와 함께 비로소 완성되는, 느리고도 완벽한 순간이었다.






리안이 지난 휴가 때 눈여겨보았던 색달리 마을의 구옥은 집에서 남쪽으로 걸어 십오 분, 자전거로 오 분이면 닿는 지척에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는 열 평 남짓의 단출한 건물. 붉은 꽃잎 몇 개만을 겨우 매달고 선 오래된 동백나무 한 그루가 구옥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 슬픔을 외면했던 가족의 응어리진 상처처럼, 이 구옥은 시간이 멈춘 채 고독한 침묵 속에 있었다. 리안은 이 낡은 집이 세상의 냉정한 셈법에서 밀려난 이들을 위한 피난처, 즉 거북서점이 되어야 함을 운명처럼 직감했다.


리안은 두 달 뒤면 스무 평으로 넓어질 푸른 지붕의 건물과 너른 마당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러나 막상 ‘일’이 현실이 되자, 영숙은 동네 서점만으로 과연 밥벌이가 될지 슬쩍 걱정이 들었다. 리안은 혹시 잘 안되더라도 자신이 직접 쿠키도 굽고, 귤 과즙 음료와 따뜻한 차를 팔아서라도 서점을 유지할 거라며 영숙을 안심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리안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리안과 영숙은 매일 공사 현장을 찾아, 둘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갈 이 공간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살폈다. 낡은 구옥의 벽이 허물어지고 새롭게 기둥이 세워지는 과정은, 마치 단절되었던 가족의 시간이 다시 이어져 응어리진 상처를 봉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공사 속도는 날개를 단 듯 순식간에 가속이 붙었다. 낡은 구옥은 푸른 지붕 아래 단단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공사가 거의 끝난 서점 내부는 아직 책으로 채워지지 않아 텅 비어 있었지만, 리안에게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공간이었다. 새롭게 뼈대가 세워지고 벽이 칠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리안과 영숙 사이에 단절되었던 아버지와의 시간도 서서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영숙은 대견하다는 듯 리안의 등을 오래도록 다독였다.






거북서점 준공을 불과 이주일 앞둔 시점, 리안은 개점 시간에 맞춰 시내 간판 매장을 찾았다.

매장 안에는 네모난 얼굴에 동그란 검정 뿔테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리안이 가까이 다가서자, 웃자란 턱수염 몇 가닥이 삐져나온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혼저 오십 서”, 하며 인사를 건넸다. 왠지 억양과 말투가 어색하다고 느낀 리안은, 자신이 직접 손으로 스케치한 그림을 그에게 내밀며 간판 제작을 의뢰했다.


“흠, 거북서점......


“벨로마씸?” ******


가게 주인의 무심한 듯 한 표정에 리안은 그가 자신이 스케치한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서점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건지 헷갈렸다. 리안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뇨, 나쁘지 않아요.”


가게 주인이 상황을 간파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서 서둘러 말한다는 게 그만 서울말이 나와 버렸다. 신박하다는 극찬까진 아니어도 참신하다는 감탄을 은근히 기대했던 리안은, 그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마뜩잖았다. 가게 주인은 이곳에 정착한 지 두 달밖에 안 되어 아직 제주 말이 서툴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리안이 십 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밝히자, 가게 주인의 낯이 불 켜진 조명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요즘 젊은 분들은 이런 채널 간판을 많이들 하세요.”


가게 주인이 리안에게 샘플을 보여주었다.


“전, 목재로 하려는데요. 목재 패널 위에 이름을 황동으로 제작하고, 글자 뒤에 LED 조명을 숨겨서 벽면 쪽으로 은은하게 비추도록 했으면 하거든요.”


어휴, 젊은 사장님이 이 분야에 조예가 깊으시네요?


가게 주인이 눈을 크게 뜨며 리안을 다시 한번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그 조합이 요즘 인테리어 좀 한다는 분들이 선호하는 클래식과 모던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널 간판은 비용 때문에 대중적이지만, 황동에 후광 조명까지 넣으시는 분들은 흔치 않거든요.”


주문을 마무리한 리안은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리안은 잘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보단 잘 버티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동안 수고했노라고 말했다.


“그래, 웃자. 지금은 웃자.”


해사하게 웃음 짓는 리안의 얼굴 뒤로 푸른 바다거북 모양의 구름들이 시나브로 지나갔다.





* 엄마, 책방 이름을 ‘거북서점’으로 하려고 해. 어때요?

** 네가 말하는 그 좋다는 가치가 우리 밥벌이까지 책임져 줄 수 있겠니?

*** 네 아버지를 잃고 평생 이를 악물고 살아온 네 엄마가, 너까지 그 고생을 또 하는 것을 볼까 봐 무섭다. 느림이라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 택하는 여유 없는 말뿐인 것 같구나, 리안아.

**** 엄마가 진정 두려워하는 건 느림이 아니라, 상실이죠. 이젠 도망치지 않고 이 느린 곳에서 잘 견뎌내며 보여줄 거예요. 엄마의 남은 삶, 제가 책임질 거예요.

***** “그래, 거북서점. 네가 제일 잘 버텨낼 이름이구나.”

****** 별로예요?

이전 27화안녕, 거북이 세 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