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거북서점 29화

나 다운 길

by 오프리

D-7, 리안은 지난번과 같이 역시 개점 시간에 맞춰 시내 간판 매장을 찾았다. 거대한 인쇄기와 기계 소리로 가득 찬 매장 한가운데, 리안이 주문한 나무 간판이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간판은 리안이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제주 구옥의 톤을 살린 짙은 나무색 바탕 위에, 거북서점이라는 네 글자가 느리고 굵은 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글자 아래에는 영숙이 쥐고 놓지 않았던 거북 핀에서 따온 듯 한 작은 거북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리안은 작업대 위에 놓인 간판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리안이 상상했던 물리적 무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하고 묵직한 존재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나무의 무게가 아니라, AI 시스템이 계산에서 제외한 인간의 속도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서의 모든 경력을 버린 결단의 무게였고, 아빠의 상실과 어머니의 우울증을 치유하겠다고 다짐한 책임감의 무게였다. 그 무게는 리안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동시에 자존과 결의를 상징하는 듯 단단하고 뜨거웠다. 리안은 간판을 트럭에 싣기 위해 포장하는 작업자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매장을 나섰다.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 리안은 운전을 멈추고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리안의 눈에 비친 바다는 희망과 고독이라는 두 가지 색깔을 동시에 띠고 있었다. 희망은 분명했다. 리안의 기억 속에 영혼의 파장이 통했던 지난 경험들. 그리고 AI의 계산이 닿지 못하는 근접한 자리에서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인간만의 가치를 중명해 준 아이리스 폴의 편지. 이제 리안은 이 간판을 내걸고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과 다시 연결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고독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간판은 효율의 세상을 등진 선언문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친구들은 리안을 '실패자' 혹은 '이상주의자'라 여길지 모른다. 이제 리안은 이 외로운 느림의 길 앞에서, 앞으로 찾아올 경제적 불안정과 고향 사람들의 낯선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리안은 운전대 위에 얹은 손끝에 힘을 모았다.


‘잘 버티는 삶. 거북서점은 내게, 나다운 길로 나아가게 해 줄 단단한 방패가 될 거야.’


멀리 푸른 지붕이 아른거리는 곳으로, 리안은 조용히 차를 몰았다. 리안은 확신했다. 자신의 서점이 가장 느린 항로로, 잃어버린 마음들이 다시 방향을 찾게 해 줄 것임을. 리안의 새로운 시작은 마치 시간의 닻처럼 황동 명패에 깊이 새겨지며,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전 28화거북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