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사이로 비스듬히 비추는 아침 햇살이 리안의 한쪽 눈에 닿았다. 잠시 후 리안의 미간이 씰그러지더니 눈이 떠졌다. 리안이 시계를 보니 10시 20분이다. 헐레벌떡 일어나 거울을 본 리안은 퉁퉁 부은 얼굴과 떡진 머리를 보고 하마터면 괴성을 지를 뻔했다. 이미 지각은 했겠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회사에 도착하느냐가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찰나에 리안은 어젯밤 환송식 뒤풀이에서 가현이 자신을 부축해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휴우, 다행이다. 회사 안 나가도 돼서......”
며칠간의 제주 일정을 마치고 짐 정리를 위해 서울 원룸으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리안은 그제야 자신이 짊어졌던 출근의 짐이 완전히 내려졌음을 깨달았다.
리안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구상한 퇴사 후의 삶이 두렵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 충분히 해볼 만할 거라 믿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던 꿈을 제주에서는 어떻게든 현실로 빚어낼 요량이었다. AI가 잠식한 양의 전쟁터에서 물러나, 프로그램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감성과 센스로 리안다운 무늬를 세상에 아로새기리라 다짐했었다. 마음은 이미 비웠기에 황량감에 질식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오랫동안 시스템 안에 갇혀 있다가 텅 빈 세상으로 나온 듯 한 낯선 홀가분함이 리안을 감쌌다.
리안에게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완전히 제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서울이라는 캔버스에 자유로움을 펼쳐볼 시간이 남아 있었다. 리안이 먼저 연락한 사람은 '고요한 활자들'이라는 독립 출판사를 운영하는 편집자였다. 리안은 그를 속으로 '은둔의 책갈피'라 불렀다. 대형 서점의 큐레이션 시스템에서는 그의 책이 늘 뒤처졌지만, 컴퓨터가 헤아릴 수 없는 편집자의 진가를 리안만은 자신의 통찰적인 안목으로 알아보았다. 리안의 손길이 닿아 제 주인을 찾은 책은, 독자에게 순도 높은 통찰의 문을 열어주었다. 리안은 북큐레이터 시절, 그의 과하게 관조적이고 개인적인 책들이 k문고의 효율 목록에서 늘 뒤처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었다. 리안의 개인적인 연결이 그나마 그의 책 몇 권을 수면 위로 올렸지만, AI 시대에는 그마저도 막혔다.
리안이 은둔의 책갈피를 만난 곳은 햇살이 잘 드는 오래된 카페의 한 구석이었다.
“리안 씨가 저에게 먼저 연락 주시다니 놀랍네요. 이제 회사 안 다니시니 시간 많으시죠?”
그는 늘어진 스웨터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리안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퇴사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내 목이 메었다.
“죄송해서요. 제가 마지막까지 편집자님 책을...... 저희 서점 시스템에 제대로 밀어 넣지 못했어요. AI 시스템은 편집자님의 책을 비인기 분야, 낮은 회전율로만 평가했거든요. 그걸 보면서 제가 뭘 했나 싶었죠.”
은둔의 책갈피는 리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효율과 비효율의 경계에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피로가 엿보였다.
“리안 씨, 저는 AI 덕분에 리안 씨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게 됐어요. AI가 등장하기 전에는 리안 씨 같은 인간 큐레이터의 노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그게 잘 안 되면 저나 리안 씨 모두 죄책감을 느꼈죠. 하지만 이젠 시스템이 '안 돼'라고 말하니, 우리는 '원래 안 되는 거였구나' 하고 마음 편히 우리 길을 갈 수 있게 됐어요.”
은둔의 책갈피는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AI가 독자에게 '잘 살라'고 외치는 동안, 저는 ‘괜찮다, 잠시 멈춰도 된다’는 책을 만듭니다. 우리는 비효율적인 길을 가지만, 절실한 독자를 만나요. 리안 씨가 추천한 그 책들, AI는 절대 그 가치를 포착 못 해요. 리안 씨의 인간적인 직관은 AI가 무시하는, 단 한 명의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어요. 저는 리안 씨 같은 큐레이터의 눈이 사라지는 게 두려웠지, 리안 씨의 숫자가 사라지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떠나셔도, 리안 씨의 가치는 변하지 않아요.”
은둔의 책갈피의 지지는 리안에게 존재의 이유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리안은 그동안 홀로 고군분투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같은 고독한 느림의 가치를 지키는 동료가 바깥세상에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