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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나 Oct 23. 2021

원망과 후회를 ‘소설’로 표현한  
아빠의 유산

아빠의 유산 - 소설 1

아빠는 유명하지 않은 소설가였다. 많은 순수 문학 작가가 그렇듯이 아빠도 모 문학상 수상으로 문단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다. 덕분에 우리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유산을 물려받았다. 아빠의 소설이야말로 우리 가족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아빠의 대표 유산이다.


아빠는 오롯이 소설 쓰는 일에만 집중하는 타입의 작가는 아니었다. 당신의 소설 쓰기만큼이나 비중을 두었던 것이 고향의 문학 자본을 널리 알리는 활동이었다. “고향 사랑”에 근간을 두는 일련의 활동은 단순히 자료 수집하기와 책 집필하기를 넘어, 문학 동호인회를 결성해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채널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고향의 (문학을 시작점으로) 문화예술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에도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셨다.


아빠의 불타는 열정은 한반도를 넘어 일본 열도에 닿을 정도였다. 진득하게 앉아서 글 쓰는 일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고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벤트에 참여 혹은 주최하는 일을 즐기셨던 분이셨고 이 기질은 일본에서도 유효했다. 일본 규슈지방을 중심으로 쌓아 올린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국악인, 도예인들의 작품을 일본 국내에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기도 하셨다. 해외에서 무대공연 또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성사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의 몇 년은 당신과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한국의 문화예술과 미를 알리기 위해 바삐 뛰셨다. 당연히 글쓰기가 우선순위의 뒤로 밀려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많은 작가가 바라는 방식으로 데뷔를 했지만 타고난 사교성과 활동성 덕분에 아빠의 인생은 “소설가”이라는 단어 외에도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당신은 수많은 수식어가 만족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자식인 나는 좀 아쉽다. 아빠에게 오직 “소설가”라는 수식어만이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은 오랜 기간 내가 품고 있는 소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도 논문 따위를 쓰는 인생을 잠깐 살아봐서 “글 쓰는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잘 안다. 한국 대학원 교수님께서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승리한다”라고 여러 번 강조하실 만큼 진득하게 집중해서 글 쓰는 일은 글을 써서 먹고살겠다는 사람에게는 필수 요소다. 하지만 아빠는 “진득하게 글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가 남긴 소설 유산은  6권의 장편 소설과 2권의 연작 소설이 전부다. 이 정도면 많은 작품을 남기신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맞는 말씀이다. 생각의 각도를 달리하면 데뷔 작품 하나로 작가 인생을 마친 분도 계시니 그에 비하면 꾸준히 써오신 분이라 할 수도 있다.


다만 글 쓰는 사람으로서 “아빠”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 온 자식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순간순간 번뜩이는 문장력을 더 소중히 가꾸고 키웠다면 더 좋은 소설, 더 많은 소설을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부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문화예술활동을 위해 아빠는 많은 이메일을 보내셨고 많은 지원금 신청서를 작성하시곤 했다. 그 속에 들어있는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이 반짝이는 재능이 이곳이 아닌 아빠 소설 안에서 확장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족의 시선일 뿐이다. 아빠 당신이 이런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아빠 인생에서 문장을 쓰는 모든 순간(소설을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할지라도)이 그저 행복하셨길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아빠의 창작행위와 소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 이야기를 이어왔는데 이쯤에서 부끄러운 사실을 하나 고백해야겠다. 나는 아빠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군데군데 읽은 적은 있지만 소설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변명의 여지도 없을뿐더러 변명하고 싶지 않다. 비슷한 상황을 다시 마주한다 해도 나의 선택은 같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내가 읽지 않은 아빠의 글은 “소설” 뿐이다. 그 외 여러 매체에 실린 칼럼이나 에세이, 사설 등은 다 읽었다. 때로는 나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도 “소설”만은 여전히 멀리하고 싶다. 작가에게 작품이란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고, 면밀하게 계산된 경제적 도구일 수도 있으며,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있다. 실로 다양한 이유로 예술가들은 글을 쓰고 조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아빠의 경우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자 수단이 소설이었다.(그저 나의 생각이다. 아빠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종갓집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난 아빠는 빤히 드러나는 재능을 가족에게 제대로 인정받은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 시골 종갓집이 그렇듯 가족 구성원의 기대와 시선을 포함한 모든 재화가 장남에게 향했다. 둘째도 아닌 셋째가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아빠에겐 이런 부분이 한없이 눈에 밟혔나 보다. 어쩌면 평생의 삶의 터전을 고향으로 정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타지로 떠났더라면 본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모르고 살았을 테고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또는 ‘(우리 집안을 위해, 형제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나라도 나서서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의욕을 갖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훌훌 털고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셨더라면 짙은 미련으로 종갓집의 대소사를 경험하고 반추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러나 아빠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고향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셋째 아들 정도 되면 미련 없이 떠날 법도 한데 아빠는 본가 근처에서의 삶을 택했다.


종갓집만이 가지는 의무와 특권, 그리고 권위와 위엄. 이것들이 정확히 아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 또한 아빠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으니 아빠의 생각을 가늠할 길이 없다. 다만,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종갓집’이라는 요소를 통해 추측해 본다면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오직 장남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듯 돌아가는 종갓집 문화를 향한 원망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명맥을 유지해가야 하는 힘든 운명을 타고난 장남을 위해 무게중심을 장남에게 두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전통이다. ‘그렇다 해도 재능 있는 다섯째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하는 원망! 당신의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평소 ‘나는 내 자녀에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소설을 통해 아빠 삶 전반에 걸친 부모 세대를 향한 원망을 엿볼 수 있다. 두 번 째는 종갓집 장손의 자식으로 그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후회의 감정이다. 선대가 모진 세월의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종갓집의 권위와 위세를 오롯이 지켜오지 못했다는 후회(격동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빠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감히 예상해 본다.  


작품으로 승화될 정도의 원망과 후회를 낱낱이 알고 싶은 자식이 있을까?

이제는 소설 읽고 난 후 어색한 표정으로 아빠를 마주할 일도 없으니 슬슬 시도해 볼만도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아빠의 소설을 읽는 게 두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혹 읽고 난 후에 밀려올 ‘아빠가 살아 계실 때 읽어보고 같이 대화도 나눌 걸’하는 짙은 후회가 선연히 떠오르는 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아빠의 유산 - 소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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