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유산 - 소설 2
<아빠의 유산 - 소설 1>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내가 아빠의 소설을 읽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빠의 유산 - 소설 1>에서 밝힌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남도의 한 종갓집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다 보니 아빠 소설의 대화체 대부분은 사투리다. “대부분”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고 싶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소설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야기 흐름을 위해 등장하는 특정 지역(배경)이나 인물상을 강조하고 싶을 때 사투리를 사용한다. 물론 간간히 지방색이 등장하는 게 아닌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소설도 있다.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순 없지만 많은 경우 사투리의 각색이 이루어진다. 지역색을 보이는 몇몇의 표현을 제외하고는 읽기 편한 문체로 다듬어진 소설이 더 많다. 가독성을 위한 선택이라 보인다.(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 또한 지방인이라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가 모국어에 가깝다. 그럼에도 아빠 소설은 읽기가 힘들다. 문자화 된 사투리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고향 지역 사투리가 모국어라고 해도 나에게 사투리는 소리로 익숙한 언어다. 생생한 사투리를 문자화한 문장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을뿐더러 지역 안에서도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발음의 사투리를 표기하는 데 일정한 규칙도 없어서 글로 표현된 사투리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평소 책을 읽을 때 눈동자를 움직이는 속도로 아빠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빠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이 부분이 난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표준어로 써 보시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드린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신다며 “지금 우리 동네 할머니들이 사용하시는 생생한 사투리(동일한 행정 구역이다 하더라도 출신 군郡이 다르면 이해가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 쓰기를 늘 고집하셨다.
“지금 우리 지역 어르신들이 쓰시는 사투리”로 점철된 아빠 소설이 읽기 힘들다고 불평했는데 어처구니 없는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나의 고집을 꺾은 것은 한국 소설이 아닌 일본 소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소설 중 하나가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69>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 중고책 판매점 체인인 BOOK OFF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소설인데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적잖이 당황했다. 소설 배경이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県(작가 고향)으로 소설 내 대회의 대부분이 나가사키 사투리였던 것이다. 첫 장을 넘겼을 때는 작가의 유명세만 보고 구입을 결정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 학습자인 내가 사투리 표기가 된 일본어 소설을 읽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 거니까 읽어보자. 해서 읽었다. 물론 처음에는 어려웠다. 설명문은 그럭저럭 읽어 내려갈 수 있는데 대화체는 익숙해지는 데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읽어가다 보니 대화체도 제법 눈에 들어왔다. 외국어의 사투리임에도 소리가 아닌 문자로 익숙해져인지 읽을수록 속도가 붙었다. 나가사키와 가까운 후쿠오카福岡에서 1년 정도 생활한 적이 있어서인지 후쿠오카의 사투리인 하카타벤博多弁과의 차이점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츰차츰 사투리 일색인 소설 <69>를 읽어가면서 소설 속 사투리의 역할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 <69>은 격동의 시대 1969년을 살아가는 혈기왕성한 고3의 이야기다. 일본의 중심인 도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인공들의 유쾌하고 과감한 언행은 독자를 매료시킨다. 소설에 푹 빠져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楽しんで生きないのは、罪なことだ”라고 외치는 등장인물의 여정에 동참하다 보면 그들이 보여주는 반항, 도전, 갈등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는 일본 열도 끝에 위치한, 수도 도쿄와는 자동차로 15시간 정도 걸리는 나가사키 지방의 사투리다. 세상의 흐름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다 반응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내세우며 당당하게 나아가는 주인공들이지만 사투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고교생이 살아가는 곳은 세상의 끝에 달려있는 소도시라고. 아마 도쿄에서 낳고 자란 이들이라면 사투리가 보여주는 공간감을 안고 소설을 탐닉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등장인물들의 포효와 포부가 사투리로 표현됨으로 인해 수도권에 닿을 수 없는 변방의 미미한 중얼거림처럼 그려진다.
겨우겨우 읽어 내려간 소설이지만 나 또한 일본인들이 느꼈을 비슷한 공간감을 사투리를 통해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일본어판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사투리가 주는 공간감의 존재를 크게 감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정보도 한몫해서 나가사키 사투리는 필수적인 소설의 구성 요소라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69> 한국어판을 읽었을 때 소설 특유의 “변방”이라는 공감간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대화 문장이 표준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국 소설의 사투리 문체를 적절히 번역하기란 쉽지 않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안다. <69> 외에도 많은 번역 소설이 표준어로 번역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표준어로 번역하는 게 가독성도 좋다) 그럼에도 사투리만이 전달할 수 있는 공간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원서로 읽을 수 없는 독자들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아쉬운 부분이다. (정말 세상 모든 소설을 원서로 읽을 수 있는 능력자가 되고 싶다.)
가독성만을 고집한 우둔한 독자였던 나는 <69>라는 소설(이후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의 <악인悪人>이라는 소설도 포함해)의 원서와 번역서의 독서 경험을 통해 사투리의 매력과 가능성을 제대로 확인하게 됐다. 간간히 등장하는 사투리가 아닌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사투리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공간감은 그 어떤 설명도 대신할 수 없다. 또 표준어로 대치될 수 없는 표현이나 단어로 그려지는 지역 특유의 감성은 사투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다. 소설 세계 구축에 효율적인 도구이자 때로는 소설의 정신을 함축하는 사투리를 “가독성”이라는 측면만으로 평가하다니. 어찌 보면 뻔한 사실에 닿기까지 이리저리 돌고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나의 통렬한 반성(아빠에게 가독성을 위해 사투리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 일에 대한)을 부추긴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덧붙이고 싶다.
일본에서 생활할 때 일본인 지인들과 술잔을 건네며 서로의 부모님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 “우리 아빠는 소설가야.”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늘 경험한 비슷한 반응이 줄을 이었다.
“부모님이 소설가인 삶은 어때?”
“어떤 소설을 쓰셨어?”
“검색하면 나오는 유명한 소설가야?”
“일본어로 번역된 작품이 있어?”
그리 유명한 분은 아니라서 일본어로 번역된 소설도 없을뿐더러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사투리가 많아서 번역하기 힘들 거라고 대답하자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사투리가 많은 소설이면 나중에 좋은 자료가 되겠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일본도 그렇지만 사투리가 등장하는 소설이 많지 않잖아. 몇십 년 지나면 언어학적 측면에서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고향 동네 사투리가 잔뜩 들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더 귀한 자료가 되겠네.”
아빠의 초기 소설은 원고지에 작성한 것들이라서 파일이 없다. 출판된 지도 꽤 되어 책 표지가 너덜거리는 것도 있다. 이런저런 핑계로 가가이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디지털화를 위해 타이핑하면서 아빠 소설을 한 장 한 장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