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브랜딩] 브랜드가 굳이 지켜내는 것들에 대하여
아이를 낳은 친구가 내게 '사는 게 너무 심플해졌어'라고 했다. '내가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굳이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우러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살면서 먹는 다른 마음들은 계속 지켜나가는 게 너무 어렵다더라. 신념은 연인같은 존재다. 신념과는 권태기도 겪고 헤어질뻔도 하다가 결국 다시 함께하기도 한다. 혹은 신념을 저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나의 신념이라고 믿었던 것이 가벼운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걸 보며 '내가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해 본 적이 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어릴 때 '절대'라는 단어를 쓸 때 마다, 엄마는 그 단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 세상에 '절대' 안되는 거도 '절대' 해야만 하는 것도 없다고. 엄마는 내가 부드럽게 살기를 바랬다. 그게 상처도 덜 받고 살아남기도 쉬운 길이니까. 어른이 되고 보니, '변화'는 예찬받고 '고집'은 비난 받는다. 엄마는 내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셨던 것 같다.
브랜드가 사람이라면, 브랜드의 메시지는 그 사람이 먹은 마음이고 신념이다. 어떤 사람은 신념을 죽을 때까지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살아가며 생각을 바꿔간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 신념 지켜봐야 꼰대 소리밖에 안듣는다. 그래서 많은 브랜드들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시즌1이 성공해서 시즌2를 내놓는 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망하는 이유는 결국 익숙함 때문이다.
최근에 '야놀자'가 '야놀자 테크놀로지'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광고를 내놓았다. 한 때 '초특가' 노래를 부르고 '광고비 아껴서 할인해드린다'라는 아이디어를 냈던 '야놀자'가 이제 '테크놀로지'라는 보통명사를 쉬지 않고 외친다. 둘 다 'HOW'에 대한 이야기인건 변함이 없다. '싸게'라는 부사가 '기술적으로'라는 부사로 바뀌었다.
'야놀자 테크놀로지'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단순한 '모텔예약앱'이 아니라, '놀기'위한 모든 기술을 담은 앱이에요' 라는 한마디다. 이렇게 충격 요법을 주면 소비자들은 브랜드가 바라는대로 과거를 곧잘 잊게 된다. 마치 방학이 끝나고 대변신을 하고 온 친구를 보고 '쟤 뭐야?'하면서 수업 시간 내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브랜드에 시선을 강탈 당하는 것이다.
정말 많은 기업들이 시대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며 생존해왔다. 디자인, 가격, 정책, 성능. 시대와 상황에 따라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껴왔으니까. 최근에는 ESG도 그 중 하나였다.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투자자들의 선택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금융회사도 'Born to be 친환경 기업'이 된 마냥 ESG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했다. 공익광고인지 금융회사의 광고인지 헷갈릴 만큼 모두가 '아름다운 지구'를 외친다.
와중에 VOLVO의 ESG 캠페인 영상을 보게 됐다. 영상은 초반부터 VOLVO가 시행하는 여러 안전 테스트를 보여준다. 그러다, '극한의 안전테스트'를 해보자며, 녹아 무너지는 빙하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오는 한마디.
"Climate change is the ultimate safety test"
단순히 자동차 사고에 대비하는 게 아니라, 지구를 지키는일이 인류를 위한 '극한의 안전'이라는 의미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서 말해버렸다.
'와 이렇게 깔때기를 친다고?'
*깔때기: 마케팅 고오급 용어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떤 내용을 전달하든간에 고유의 컨셉과 메시지 방향성을 고수하는 행위
https://www.youtube.com/watch?v=hTjLmHXoNNw
VOLVO의 창업자들을 식당에서 가재요리를 먹으며 VOLVO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먹던 가재가 땅에 떨어지고도 금 하나 가지 않고 멀쩡했던 거다. 그들은 "저 가재처럼 튼튼한 차를 만들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무위키 출처임으로 신화적 루머일 수 있다) 스웨덴의 바람과 눈을 이기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안전'을 목표로 자동차를 만들었다.
원래 자동차용 안전벨트는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탈 때 매는 2점식이였다. 두 군데를 잇는 벨트로 상체를 고정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볼보는 1958년 왼쪽 어깨 위와 허리 양 옆으로 고정하는 3점식 방식의 안전벨트를 특허로 출원한다. 2점식으로는 상체가 앞으로 튀어 나가는 사고를 막을 수 없었지만 3점식은 100만명의 생명을 구하면서 모든 자동차에 장착되었다.
그 때부터 볼보는 무조건 '안전'을 외쳤다. 그들은 '안전'이라는 깔때기를 한번도 놓은적이 없다. 디자인도 라인업도 경영 방식도 전기자동차도 모두 안전을 위해서다. '지구를 생각하는 전기자동차'가 아니라, '환경의 위협으로부터 당신을 안전하게 하는 전기자동차'인 것이다.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다가 벤츠의 로고로 바뀌는 벤츠의 친환경 커뮤니케이션과는 다르다. 이것이 바로 깔때기!
볼보에는 내가 사랑하는 인터뷰 시리즈가 있다. <One of a Million - Survivor Stories >이라는 흑백 인터뷰 시리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교통 사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옆자리에 있던 남편과 친구들은 세상을 떠났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볼보가 안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전방위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_WFwVOYn8
깔때기를 놓치 않는 볼보는 아마 몇십년이 지난 후에도 'Safety'를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돈이 도는 시장에서 나아가 인류가 어떤 환경에 살고 있더라도 당신을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 것이다. 그 깔때기는 몇 세대를 넘어 우리를 유혹하겠지!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고 신념을 지킨 댓가로, 세대를 넘어 우리의 지갑을 털어가리라!
내가 사랑하는 선배들이 오래동안 리드하는 브랜드 중에는 맥심 카누가 있다. 커피를 만들고 커피를 맛있게 음미하는 공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인 카누. 선배들은 이 컨셉을 10년 가까이 지켜가고 있다. 변할까, 바꿀까, 라는 고민을 수없이 하며 '변화의 유혹'에 흔들리면서도 브랜드가 굳이 변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데 더 용기를 내는 브랜드들이 있다. 깔때기를 놓치 않은 용기에 고객들은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2021. 0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