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브랜딩]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소음에 대하여
2010년 Cannes Creative Awards 라디오 부문에서 수상한 광고의 스크립트 하나.
S.E)
아이들이 말썽 피우는 소음
NA)
당신이 엄마라면,
가장 자주 듣는 소리란 ‘카오스’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겠죠.
‘카오스’는 당신이 집에 있을 땐 집에서,
당신이 차 안에 있을 때는 차에서 벌어질거에요.
당신이 어딜가든 따라다니고
심지어 당신이 가는 곳마다 더 심해지기도 해요.
물론 집으로 돌아올 때도 여전해요.
‘카오스’는 당신보다 먼저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엄마들이라면 알거에요.
이 카오스가 얼마나 행복한 소음인지.
(침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
우리의 걱정이 시작되니까.
건강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HBF
건강 보험 광고였다. 엄청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광고는 아니지만 부모들이라면 한 번 쯤 느껴봤을 순간의 청각적 이미지를 영리하게 이용했다.
어릴 적 나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함께 텔레비젼을 보다가 할아버지는 줄곧 낮잠에 드셨다. 나는 할아버지 손에 쥐어진 리모콘 버튼을 조심스럽게 눌러 채널을 바꾸었다. 할아버지는 큰 코와 큰 콧구멍을 가진 분이었다. (그 오똑하고 커다란 코를 보고 자란 탓에 나는 아직도 코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 그 큰 코가 내는 소리는 엄청났다. 수없이 많은 밤을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을 할머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코가 내는 굉음을 꾹 참고 숨 죽인채 만화 채널을 봤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의 소리가 멈췄다. 깼구나. 난 다시 재미 없는 배구 경기를 봐야하는 건가.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뭐지. 할아버지 얼굴에 수직으로 내 얼굴을 맞대고 지켜보다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 몸의 땀구멍이 순식간에 촉촉해졌다. 땀이 나는데 추웠다. 등골이 서늘하다는 느낌을 그 때 처음 배웠다.나는 할아버지! 하고 외치며 할아버지의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아이! 하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코골이로 인한 수면 무호흡증이었던 것 같다.
청각은 눈 앞에 없는 것도 감지한다.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멀리 있을지라도 청각 만큼은 계속 그 대상 곁에 둘 수 있다. 부엌에 있는 엄마의 비명 소리와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처럼 대부분의 비극은 새로운 소리와 함께 등장한다. 그래도 그런 소리는 대상이 아직 내 근처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적어도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그널을 보낼 수 있는 상태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사소한 소리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 침묵은 오직 ‘부재’가 내는 소리다.
외국에 오래 머무를 때 굳이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놓을 때가 있다. 보지 않는 프로그램도 굳이 틀어 놓는 이유는 내 청각에 살가운 모국어로 밥을 주기 위함이다. 모국어로 배가 부르면 몸이 따뜻해지고 소화도 잘되는 것 같다. 사진으로만 보는 엄마보다 동영상으로 보는 엄마에 더 눈물이 나는 건, 엄마가 단순히 움직이고 있어서가 아니라 엄마의 목소리와 말투가 내 귀에 선명하게 때려 박혀서 일거다.
시끄럽게 잘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적막으로 대답해 온다면 어쩌지. 그 순간 이후의 장면을 잔인한 마음으로 상상해본다. 방으로 뛰어간 엄마는 아무도 없는 방을 발견하고 주저 앉을 것이다. 그제서야 얼마 전 아이를 잃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울지도 모른다. 혹은 방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안고 미친듯이 뛰어 나가야하겠지. 신발을 신을 새도 없고 도움을 청할 새도 없다. 그렇게 몇 년 짜리, 혹은 평생을 이어갈 비극에는 목소리가 없는 법이다. 조용하다.
혼자 살고보니, 명절에 손주들이 시끄러운 밀물처럼 왔다가 돌아가 버린 후의 시골집 심정을 알겠다. 친구들이 술판을 벌이고 음악을 틀고 돌아간 밤에 혼자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소음이 그리워진다. 달그닥 달그닥. 설거지 소리가 청승맞다.
‘존재’가 내는 ‘소음’이 그리워서 고양이를 들인지 5개월이 되었다. 친구의 고양이가 몇 해 전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떴기 때문에 고양이가 물을 잘 마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있다. 컴퓨터 화면에 빠져 모든 감각이 문을 닫고 있는 와중에도 고양이가 물을 할짝이며 마시는 소리만큼은 마음에 바로 와 닿는다. 할짝 할짝 할짝. 그 청명하고 맑은 소리만 들으면 긴 날숨이 나오고 웃게된다. 누군가의 소리가 날 웃게 만든다는 게 자존심 상하고 느끼하지만 사실이다. 몸을 움직여서 물을 마시는 고양이를 본다. 혀가 빠르게 나왔다 드러가며 물을 길어 오른다. 어제 채워준 물이라 미지근할텐데 참 맛있게 먹는다. 할짝 할짝 할짝. 잘 살고 있구나. 건강하구나. 계속 들려줘.
2020.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