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 브랜딩] Adobe의 새로운 친구 사귀기
좋아하는 남자 때문에 열심히 야구를 챙겨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진심이 돼버려서 나는 두산베어스 정수빈의 팬으로 1년 정도 살았다. 이 글을 읽는 야구 찐팬들은 ‘그건 진심이 아니야!’라고 생각하실지도. 정수빈 팬들이 꼭 그의 실력 때문에 팬이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환학생을 유럽으로 갔을 때는 유럽 축구를 열심히 챙겨봤다. 친구들은 밤마다 강의실을 빌려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챔피언스 리그를 함께 보며 각자의 언어로 환호하거나 욕을 했다(귀여운 스페인 친구의 “Joder!”를 잊지 못해!) 나는 또 쉽게 진심이 되어서는 당시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었던 ‘메수트 외질’의 팬이 되었다. 해가 뜰 때까지 외질의 어시스트 모음 영상을 챙겨보고 나니,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사빠 체질 덕분이었다. 나는 좋아했던 사람과도 유럽 친구들과도 결국 가까워졌다. 새로운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호기심이 가는 건 본능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싶어지는 마음.
인간관계를 잘 개척해나가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묻는 것에 거침 없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분야거나 싫어하는 분야였어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그들은 은근하게 파고들어 간다. 호기심의 적은 ‘관성’이다. 내가 계속 하던 것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열등한 것’ 혹은 ‘미숙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싶을 때는 자신을 일부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편견없이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며칠전 검색창 옆에 굉장히 웅장한 댕댕이 사진이 떠있는 걸 봤다. 시바견으로 보이는 댕댕이가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 댕댕이 뒤로는 노을진 하늘이 너무나 장엄했고 댕댕이의 눈빛은 영롱했다. 어도비 포토샵의 광고였다. “반려견 사진의 분위기를 바꿔보세요”라는 카피와 함께. 배너를 눌러보니 찬란하게 닦인 댕댕이의 초상들이 화면 가득해졌다.
어도비는 원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모두가 크리에이터인 시대가 왔지만 어도비보다 훨씬 쉬운 앱들이 있어서, 일반인들은 굳이 어도비까지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어도비가 갈 수 있는 전략은 두가지였다.
더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기능을 내세워 ‘일상적인 앱’들과 선긋기를 한다.
‘일상적인 촬영’을 즐기는 고객들을 더 많이 확보한다.
그리고 어도비는 두번째 전략을 선택했다. 30년이 넘은 브랜드로서 ‘프로페셔널’이라는 체면을 내려놓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새로운 친구는 바로 댕댕이 엄마 아빠들과 집사들. 우리가 '끼리 끼리 논다'는 말을 하듯이 브랜드도 어떤 고객을 사귀냐에 따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의한다. 한 때, 카메라 광고의 주된 배경이 ‘대자연’에서 ‘거실’과 ‘가족’으로 넘어온 시기가 있었다. 고객들이 사랑하는 피사체가 자연뿐이 아니라, 가족과 일상이 되었으니, 카메라 브랜드들도 그들의 ‘가족’과 ‘일상’을 사랑해야지 별 수 있나. 어도비도 ‘전문성’을 기반으로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가 아니라, ‘애정’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는건, 스스로 브랜드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다.
‘강아지 찍는 사람이 굳이 포토샵을 하겠어?’라는 질문에 다들 갸우뚱하겠지만 어도비는 그들의 사랑이 포토샵을 결제할 만큼 크다는 걸 안다. 모델의 얼굴에서 턱을 깎고 모공을 지우는 디자이너가 있는가 하면, 댕댕이의 눈에 별 하나 찍기 위해 포토샵을 켜는 아버지가 있다. 그래서 어도비도 댕댕이를 탐구한다. 댕댕이의 부드러운 털이 더 돋보이게 하는 매뉴얼을 소개하고 댕댕이의 풍경을 지저분한 거실에서 예쁜 풍경으로 바꾸는 꿀팁을 게시하는 거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내가 야구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유럽 리그를 보려고 노력했듯이 브랜드들도 고독사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고객을 사귀기 위해 거침없이 사랑에 빠져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모든 브랜드들의 인재상은 다른 거 보다도, ‘금사빠’여야하는 거 아닌가.
2021. 09.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