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지윤 Oct 23. 2021

반대 편 우주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 사는 곳 


우리는 밤 9시쯤 부암동에서 만났다. 그는 무방비 상태로 나온 것 같았다.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로퍼를 신고 나왔는데 그게 나름의 무장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샌들을 입거나 싸이클링을 하던 쫄바지를 그대로 입고 나와 데이트를 했으니까. 그가 미리 알아 차렸던 아니던 간에, 나는 총을 품고 있었다. 뻔뻔하게 총을 숨긴 채 그와 함께 쭈꾸미 삼겹살 구이를 먹었다. 몇 점은 깻잎에 싸먹었고 몇 점은 그냥 먹었으며 사이다로 입가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의 평온한 표정이 그에게 무안을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했다. 




배가 부른 우리는 산책을 시작했다. 윤동주 시인의 거리 밑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그날따라 미세먼지가 없어서 남산타워는 쓸데없이 선명하게 보였다. 두팔을 경쾌하게 흔드는 가족들이 꽤 자주 오갔지만 우리가 워낙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 탓에 신경쓰이지 않았다. 경복고등학교를 반환점 삼아 우리는 다시 언덕으로 올라왔다. 본인에게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그는 지난주 동안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잠시 세우고 마침내 조심스럽게 총을 꺼냈다.




있잖아. 그런 생각을 해봤어. 내가 오늘 만약 사고로 죽어. 그러면 장례식이 열리겠지. 너는 당연히 장례식에 올거고,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거야. “제가 남자친구였어요” 라고 말하겠지. 그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은 너로 남겠지. 물론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무도 기록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 우주는 그렇게 기억할거야. 그런데 있잖아. 그렇게 되면 내가 떳떳하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스스로에게 당당할만큼 널 좋아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야.




목소리는 담담하기 보다 담백에 가까웠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었다는 끔찍한 동화를 상냥하게 구연하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친절하고 자상한 총성이 울렸다. 논리적이고 자상한 설명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구나. 그 이후에는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한다.




도무지 답이 안나는 결정을 두고 나는 줄곧 죽음을 끌어온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우주가 나를 어떻게 기억해주면 좋을까. 우주와 죽음이라는 거대한 총알은 내가 시키지 않아도 제 발로 오답을 향해 날아가곤 했다. 그리고 그날은 하필 그 자리에 그 친구가 서있었다. 




내가 제거한 오답들이 모여 사는 반대편 우주가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서 나는 그와 계속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으며 성실하게 일하며, 깨끗한 채소를 즐겨 먹으며 안녕하게 살아간다. 쓸데 없는 고민때문에 ‘우주’까지 논해야하는 나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서른 셋의 나이에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느라 ‘죽음’까지 끌어 들이는 어리석은 나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총은 늘 정답을 겨누고 있었고 나는 바보같이 오답의 우주를 가꾼다. 





2021.5.

이전 01화 너에게는 없는 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