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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Aug 19. 2020

솔직하게 대면할 용기, 'Jazz it up'

언어보다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면 되니까.

Diana Krall-Live in paris(2002), Rio(2008).



 누구나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이외의 타인들을 위한 대답과 선택을 했던 경험 말이다. 본인 스스로 이상화 한 관계성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정작 '나'에 대한 속마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매번 꼭꼭 씹어 삼켜버렸을 수 있다. 그저 똥이나 되라고.


 단순히 혼나고 싶지 않았고, 다투고 싶지 않았고, 착한 사람(딸, 연인, 친구, 동료 등)으로 비치길 바랬고, 칭찬을 듣고 싶어서 타인이 원하는 나를 만들어 가는 것에 스스럼없이 뛰어든다. 그리고 또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위와 같은 상황이 아주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알고리즘으로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 개인으로써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적절한 판단 과정을 결정하기도 전에 말이다. 이건 학교 다니면서 엄마 밑에서 밥 얻어먹을 때야 괜찮지, 술 담배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그 시점부터는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상황이 닥칠 때 적절한 반응과 표현을 내보이는 것에 대하여 인색해질 수 있다. 그동안 똥이라 되라고 내버려 두었던 것들은 사실, 똥이 아니고 '나의 본질'이었으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타인과 유익하고도 적절한 교류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의 욕구와 집단의 방향성 등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 또한 명료해야 한다. 둘리가 홀로 수억 년의 시간을 넘어 쌍문동에 자리를 잡고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와 살면서도 행복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고 간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리에게는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을 수 있었다. 만약 둘리가 고길동의 집에서 밥이라도 얻어먹고 사는 것에 우선을 두고, 팔자에도 없는 개가 되어 한심한 수준의 초능력이나 가끔 써먹는 마당살이를 자처했다면 전 세계를 넘어 우주의 얼음별까지 넘나드는 멋진 여행길을 떠날 수 있었을까?


 사회인지의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은 본인이 소속된 사회를 살아가면서 타인과 함께 경험하는 교류를 통해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인식하고 이해한다. 또한 점점 성장을 하며 다양한 이해의 측면이 넓어져 본인이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들을 결정하게 된다. 그 행동들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던 경험들이 모여 사회성이 된다. 이때,  '타인'의 감정, 정서, 의도, 성격, 욕구 신념, 행동의 원인 등에 관한 내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나'의 내적인 특성을 충분하게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보일 수 있는 반응과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추후 인색하지 않은, 서로가 진정으로 원활하게 교류하는 상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나 또한 착하고 말 잘 듣는 딸로서 살기를 노력했다. 혼나기 싫어서 거짓말을 자주 했다. 마음이 좀 찔렸지만, 당장 혼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약간 머리가 크면서 나의 본심을 말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래서 본심을 반영한 행동을 표출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했다. 하지만 나로 인해 가족들이 실망하는 것을 보고야 만다. 그때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본심을 드러낼 적절한 수위'를 경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실망스러워 삶의 태도를 바꿀 수 밖에 없게 된다. '인색하게 살기'로.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 그렇게 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계속 퇴화하기를 자처했다.

 그렇게 퇴화하고, 퇴화하며 똥만 만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래도 내가 운이 좋았는지 시간이 지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속마음까지도 인정해주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내가 혼자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며 곁을 주지 않고 있었음을 또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적절한 행동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진짜로 내가 나를 드러내야 할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사람인 나를 보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그때, 다음과 같은 영상을 보게 될 기회가 생겼다.



https://youtu.be/N0bXQ6DuIBE

Diana Krall Live in Paris (2002)


https://youtu.be/V38OrWI1t6U

Diana Krall Live Rio de Janeiro (2008)


 예술가의 영혼을 살찌우는 콘텐츠 제작소 '재즈 에비뉴' (링크: https://www.youtube.com/c/재즈에비뉴JazzAvenue) 대표를 하고 있는 친구의 추천이었다. 재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건 몇 달 된 것 같은데, 여전히 12 조성의 A폼 , B폼 가이드톤을 못 외우고, 적용시키지도 못해 큰 고난을 겪고 있는 나의 마음에 대하여 본질적인 이해를 이끌어주었다. 

"재즈란 무엇일까?"라는 그의 질문 "글쎄, 무엇일까. 뭐, 순수한데 순수한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는?"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지금 이 순간, 에 대한 것이야. 과거의 것들도 현재 이 순간에 모두 담을 수 있는." 사실 친구의 대답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대략 그렇게 기억한다. 당시 속으로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정확히 경험하지 못해 모르겠다'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눈물질질 흘리며 골머리 빠지게 멍청하기 짝이 없는 텐션을 넣 <all the things you are>을 굼벵이처럼 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다. "도대체 나는 그래서 언제 '지금 이 순간'이 올 건데".


 다이애나 크롤의 두 공연 영상은 그동안 재즈 장르에서 좁은 범위의 음악 청취를 했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Eddie Higgins Trio와 Beegie Adair Trio를 중심으로 트리오만 들었는데, 피아노가 보컬도 하면서 기타, 베이스, 드럼, 오케스트라까지 큰 규모의 연주형태였다. 아는 곡은 하나 정도? 그래서 그냥 흘러가듯이 '들릴대로 들려라' 라며 편하게 들었다.


 처음 들은 프랑스 공연은 정말 편안하게 감상했다, 라는 말이 적절하다(아는 게 있어야 들릴 것이 있을 텐데, 아는 것이 없었으니). 서정적, 이완적, 지지적. 가장 눈에 띄었던 건 퍼커션 연주자였다. 셰이커를 저렇게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니. 저 조합에서 '셰이커가 없었다면..'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절대 안 돼.'라고 혼잣말을 했다. 어쨌든 다양하게 모인 악기들로 가장 최선의 무드를 위한 텍스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 혹시 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다양한 음악 전공생들이 해당 영상을 본다면 꽤 얻을 것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있더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나의 전공인 클래식 피아노의 감상 시 나도 함께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연주자가 경험할만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역시 재즈는 아는 게 없어선지 손가락이 잠잠했다. 대신 의식하지도 못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으니 격렬한 율동은 아니지만 무드에 맞게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부드럽게 움직이거나, 노래가 빨라지는 대로 고개를 앞뒤로 흔들고 있더라. "재즈는 춤을 추기 위한 것"이라는 친구의 말이 뻥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가능하더라는 것.


 그다음의 리오 공연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인상 깊었다. 원래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45:09부터 시작된 "Cheek To Cheek"을 시작으로 솔로 연주를 하고 있는 다이애나 크롤을 보는 다른 악기 연주자의 표정에 시선이 옮겨졌고, 팀으로써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웃네?', '서로 되게 자주 바라보네?', '왜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보며 끄덕거리지? 또 웃지?', '서로의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따라 하는 것 같은데?', '즉흥연주인데도 명료한데? 막 되는대로 치는 게 아닌데? 어떻게 한 거지?', '본인의 연주에 굉장히 빠져들어있네? 만족스러워하네? 만족스러울 수도 있는 거야?', '발 리듬을 엄청 세게 구르는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이 눈치를 안 주네?', '관객들에게 노래를 엄청 많이 시키네?', '관객들이 생각보다 노래를 잘하네?' 등등.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최선으로 진중하게, 눈치 보느라 할 말을 미처 하지 못하게 되는 일 없는, 집중하여 열심히 임하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위치한 자리에 상관없이 해당 순간을 존중하고 함께 기뻐하는, 상대의 열정에 대한 감탄과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상대의 훌륭한 부분에 언제든지 함께 맞추어가기를 망설이지 않는, 위치에 상관없이 지지하는 등. 더 쓰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이게 사회에서 이루는 인간들의 의사소통과 다를 바가 무엇이고, 상호작용과 다를 것이 무엇일까. 오히려 정리한 언어보다 더 솔직하고, 과장된 억양보다 더 풍성한 감정이 담기고, 중언부언 대면하여 떠드는 것보다 믿음직스럽고, 말도 안 되는 예시보다 직관적이고, 깊은 전율이 있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인류는 어쩌면 언어보다 재즈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분명한 이론으로 중무장해 그것을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부분 말이다. 재즈의 모습으로 사회의 사람들을 만난다면 타인의 다양한 내면의 정보들을 명료하게 인지하게 되고, 나 또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 내의 자아를 표현하고 이를 행동으로 표현하며 함께 동조화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시도하자. 아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표현과 행동의 정도와 범위, 강도는 본인의 선택이다. 우리를 향해 관통하는 큰 흐름 안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까.


솔직하게 대면할 용기를 찾았다. 말로 하기 어렵다면, 언어보다 확실한 것을 사용하면 되니까.


'Jazz it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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