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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Oct 03. 2020

재즈는 남은 자들을 결코 홀로 두지 않는다.

Wynton Marsalis -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

https://www.youtube.com/watch?v=LOluh_1_rlw



 30d 재즈 듣기의 세 번째 시간이 돌아왔다. 윈튼 마살리스의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과 함께 하였다. 튼 마살리스는 재즈의 본고장인 'New Orleans'의 출신이다. 아무래도 재즈의 역사를 논할 때는 결코 뉴 올리언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디 뉴 올리언스는 프랑스령 식민지였으나 해당 지역이 미국에 판매되면서 미국의 도시가 되었다. 멕시코만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덕에 1, 2차 세계대전과 남북전쟁 때 해군기지가 위치하였는데, 종전 후 군악대들이 사용하던 악기들이 길가에 다수 남게 되자 동네 사람들이 이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게 되면서 재즈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노예해방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흑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군기지 주변에 있는 윤락업소 내의 밴드에 취업을 하여 그들이 연주하던 음악이 초창기 재즈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뉴 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초창기 재즈는 전쟁이 모두 끝난 뒤 군악대가 사용하였던 악기들을 활용한 마칭밴드의 형태의 재즈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당일 들어본 윈튼 마살리스의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이라는 곡은 쉽게 말해 장송곡과 같은 용도라고 볼 수 있다. 그 가사 또한 영혼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행렬을 담고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영혼을 떠나보내기 위한 예식을 장례를 치르러 가는 첫 번째 행렬(First Line)과, 돌아오는 두 번째 행렬(Second Line)의 모습이 상반되게 나타났다.


 흥미로운 것은 First Line에서는 슬픔과 애도를 안고 갔지만, 두 번째 Second Line에서는 굉장한 축제를 열었던 것.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행렬에 참여하고 우리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흥겨운 모습으로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장례식 행렬에서 시작된 음악을 현재 '세컨드 라인 스타일'이라 불리고 있다.


https://m.youtube.com/watch?v=TviGgyEGDFs






 우리나라의 정서에서는 사람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굉장한 슬픔으로 여겨진다. 좋은 죽음(?)을 맞지 못하면 생전 가졌던 서러움과 응어리가 한(恨)이 되어 -이 세상에 한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이승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는 내용으로 다양한 매체에서 소비되는 건 흔한 클리셰로 쓰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남은 이'를 위한 배려의 모습은 다양하게 존재해 온 듯싶다. 간단히 떠오르는 대로 꺼내어 보자면. 상주와 상재들이 지나치게 슬픔에 잠겨있지 않도록 문상을 온 조문객들이 나름 활기차게 식사를 나누거나, 더 나아가 화투판을 벌이는 것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내버려 두어 시끌시끌한 환경을 만든다던가(…).


 윈튼 마살리스의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 또한 '남은 자'들을 위한 문화에서 탄생된 음악일 것이다. '떠난 이가 어련히 좋은 곳으로 떠났으려니' 하며 그를 위해 기뻐하고, 상실에 대한 빈자리를 느낄 유가족들을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부산스럽게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단순히 어색한 톤의 낱말들을 연결하여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색하게나마 연주해왔던 악기를 쥐고 다 함께 부를 수 있는 고향의 노래를 시작다. 자신들 피에 새겨진 그 노래는 모두의 몸과 마음 움직이게 하여 그에 몰입하며 더욱 격해졌을 것이다. 노래가 워낙 흥겹다고 무조건적인 흥겨움이라는 단일정서만이 존재하는 것은 었을 것이 예상된다. 혹시라도 터져 나올 울음까지도 걱정 말고 터뜨릴 수 있도록 지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재즈는 그리하여 의미가 있다. 단순히 여흥의 소비를 목적으로 둔 시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종용된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흑인들은 존재 자체 부정당했으므로 자신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 무력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태들을 충분히 경험하였을 것이다. '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소리조차  수 없 목소리는 자꾸만 자신의 영혼으로 빠져들어가 아픈 이야기들을 오직 스스로에게 되뇌고 속삭였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중에 사랑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낼 때 그것은 당장 실체화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가장 솔직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이다. 현존하는 그 어떤 문자도 해낼 수 없다. 오직 음악만이, 재즈만이 그들 영혼에 갇혔던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결국 이끌어 낸 것이다.


 흔히 재즈는 다소 어려우며 난해하고 재미도 없다 말한다. 각 개인에 따라 재즈보다 훨씬 유익한 장르의 음악을 사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가 재즈의 어렵고 난해하 재미없는 부분에 대한 깊은 상심으로 인하여 재즈의 정신에 대해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개인 내적 고찰에 대한 기회를 상실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글을 쓰는 나와, 나의 글을 읽는 당신은 모두 '남은 자'였던 사람이니까.  


재즈는 남은 자를 결코 홀로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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