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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Oct 06. 2020

재즈스타 탄생의 순간을 바라보며


Louis Armstrong-Dinah


https://www.youtube.com/watch?v=BhVdLd43bDI&t=40s

 30d 재즈 듣기의 다섯 번째 시간. 나름 고대하였던 루이 암스트롱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어렸을 땐 루이 암스트롱의 특유의 목소리가 개그의 요소로 소비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의 유명한 넘버 중 <What a Wonderful Wolrd>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아, 이렇게 미치도록 끝장나는 음악도 있었네."


 

내가 궁금해서 찾아본 코넷. 귀여운 트럼펫처럼 보인다.


<La Vie En Rose>, <What a Wonderful Wolrd>로도 익숙한 루이 암스트롱 또한 재즈의 본향인 뉴 올리언스 출신이다. 이쯤 되면 '성장환경이 한 사람의 재능과 포텐셜에 대하여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고민은 끝난다고 본다. 그렇다고 나도 학군 따라 이사를 다닐 것은 아니지만.

 루이 암스트롱은 트럼펫과 비슷한 작은 악기 '코넷'을 연주하 음악가였는데, 고향 선배 킹 올리버밴드에 합류 제안을 받아 시카고에 오게되면서 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다.


 킹 올리버는 어제 살펴보았듯이 보드빌의 밴드 리더였다. 보드빌 밴드는 무대 위에 올려지는 예술을 위한 BGM을 의 역할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아마 루이 암스트롱이 계속 그 밴드에서 음악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면 재즈의 역사는 당 시간 주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 암스트롱 필연적으로 최초의 재즈스타가 되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밴드 동료였던 피아니스트 릴 하딘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암스트롱 훌륭한 음악적 재능에 비해 쇼 비즈니스 감각과 야망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았던 릴 하딘은 그를 설득시켰고 보드빌에서 나와 'Hot Five'를 꾸려 그들의 음악을 시작하였다. <West End Blues, (1928)> 암스트롱의 초기 솔로 연주와 최초의 스캣(Scat: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녹음으로 유명하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참고: INDIEPOST, 무명 루이 암스트롱을 최초의 재즈 스타로 만든 릴 하딘. 2018/03/11).

https://youtu.be/pXHdqTVC3cA


그러니까 이때로 부터 암스트롱은 트럼펫 연주자이자 보컬로써 자신을 무대에 세웠으며, 우리가 아는 '재즈'의 모습은 당시의 그를 통해 최초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1940년대 이전은 녹음기술의 한계로 인해 곡의 길이는 3분을 넘기 어려웠고 앨범의 개념조차 없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컴필레이션 앨범(콘셉트나 베스트 곡들을 모아 만든 앨범)이다. 그의 앨범을 들어보면 오리지널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Ella and Louis> 상수에 위치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카페에서 처음 들었던 앨범으로 기억한다. 이 앨범을 다시 살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다니. 감격스럽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L-NbN8uTOijqTJxQ9BMFcDe7UiWDMVwc


<Porgy and Bess> 조지 거쉰을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 기억할 포기와 베스의 수록곡이 녹음된 앨범이다. 재즈가 아무리 미국 음악이라지만 정말 미국스럽다. 다른 앨범이 마블 전체라면, 포기와 베스는 '캡틴 아메리카'랄까.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8MEZuBkYyVZzes_UJd21JNsqGvx_Va98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을 들어보면 가끔 편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흑인 특유의 피지컬이 빚어내는 거친 음색, 쨍한 브라스의 대표적 악기인 트럼펫의 연주를 듣다 보면 다소 거친 노면을 달리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의 음악을 '듣고', '읽고', '시청'하는 것을 통해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의 진정한 매력을 이제 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 잘하는 것 같아 멍석을 깔아주면 그 위에서는 오히려 안 시키는 것만 못한 모습을 보여 모두에게 실망을 는 사람 말이다. 멀리 찾아볼 것도 없다. 그건 바로 나니까.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전혀 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시간이 지나, 입시를 할 나이까지 찼는데도 여태 그 모양인 나를 보며 다시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쟤가 착해서 그래. 원래 좀 못된 애들이 독기 품고 잘하거든." 하지만 나는 착한 '척'을 할 뿐이었지, 진짜로 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모두를 실망시키는 아이콘이 되어 나 스스로조차 를 포기해버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는 무대를 오히려 즐겼던 아이였다. 콩쿨에 나가면 스스로 들어도 내가 가장 잘 치는 것 같이 들렸다. 물론 주관적 느낌이었다는 것이 확실했는데, 심사평은 늘 똑같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연주를 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나를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아이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리허설을 하던 중 나와 극명히 다른 음악성을 가졌던 남자아이가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떠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아주 섬세한 연주를 했고, 부드럽고 풍성한 톤을 가졌으며 성숙한 음악성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맨날 피아노를 겁 없이 막 친다고 혼나는데. 쟤는 떨어서 더 부드럽게 잘하는 건가? 그럼 나도 한 번 떨어봐야겠다!" 그 이후, 나는 입시를 하기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끔찍한 무대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개인적인 음악성은 훨씬 나아졌지만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매력적인 톤을 가지고 있다. 본 모습을 지우고 가식적인 얼굴로 살고자 한다면 언젠가는 탈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난 부분이 있다면 세월이 그것을 성숙하게 다듬어 줄 것이다. 삐삐 머리를 하고 다니던 시절의 나는 나다운 모습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 씩씩하게 남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나를 꺼내어 보이는 것에 인색하지 않던 모습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을 통해 나를 충분히 이해 받았더라면 더 자신 있는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쉽지만, 앞으로는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루이 암스트롱은 물론 나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 훌륭한 뮤지션이다. 이미 훌륭했던 그는 그를 더 빛나게 할 방법들을 적극 권장하는 이들이 곁에 있었고, 그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도구적 역할에서 소비되기만 했던 재즈를 독자적 장르에까지 오도록 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의 음악을 믿어주었던 릴 하딘이 없었더라면, 암스트롱이 스스로를 바꿀 힘을 발휘하지 못했더라면, 우리에게 <What a Wonderful Wolrd>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야말로 전 세계적인 손실이 아닌가.


 남부의 시골뜨기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를 정립했다. 우리도 각자의 삶을 정립하기 위해 애써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다소 거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라도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자체로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오늘 용기를 내어 공모전에 거친 글을 보냈다. 나도 안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그래도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에 대한 지인들의 응원에 보답하고자 첫 번째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매일 나를 정립할 그 날을 바라보며 움직일 것이다. 다시는 숨어 사는 것에 만족하며 아까운 기회들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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