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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Oct 10. 2020

걱정 마. 음악은 결코 너를 해치지 않아.

 1940년 전 후로 시작된 '비밥'은 백인들에게 가볍게 소비된 스윙에 대한 반동으로 흑인 뮤지션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https://youtu.be/09BB1pci8_o

'Dizzy Gillespie'의 <Bebop>

색소포니스트로 유명한 찰리 파커와 함께 비밥의 시대를 이끌어온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



 '비밥' 또한 '스윙'과 마찬가지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졌다. 흑인들의 음악인 '스윙'에 춤을 추었던 백인들은 그들이 향유하는 춤판을 위해 스윙이라는 가치를 이용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클럽에 놀러 온 백인들과 그들의 흥을 최대 상한으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최대 인원으로 고용된 흑인 빅 밴드 연주자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역시나 자신들을 위한 음악을 펼치지 못했던 흑인들의 서러움이 쌓여왔을 것은 당연하다.


 결국 흑인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음악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한'을 풀어내기 위해 무려 을 마친 늦은 밤, 뉴욕 뒷골목의 클럽에 모이기 시작다. 흔히 말하는 '잼 세션'(Jam Session)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었다. 정해진 반주나 연주를 수행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연주를 '즉흥적'으로 맞추어가는 연주형태였다.


 예전 글(솔직하게 대면할 용기. 'Jazz it up')에서 재즈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이들은 그저 타인을 위해 소모되던 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음악'를 하고 싶었 것이다. 내면의 다양한 감정과 정보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며 인식할 수 있었던 방식인 음악을 통해서 말이다. 그것이 음악으로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유능한 사회적, 소통적 기능이니까.


 그리하여 그들은 비밥을 연했다. 하루를 꼬박 지내며 꾹꾹 눌러온 생각과 감정을 이렇게 살벌하게 표현해내었다. 자신들의 음악을 그저 가볍게 소비할 수 없도록 아주 빠르고 현란하게 연주했다. 마치 '이래도 당신들이 넋을 잃지 않고 감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는 '이 음악에서도 과연 춤을 출 수 있으면 춰보라지!'라고 과시하는 듯하다. 이와 같은 음악적 행위를 통해 통제감과 주도력을 실현한 것이다. 자신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도에 따라 펼쳐낸 음악들이 그 의미에 비로소 충실하게 되었으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AMuItUv9xZc

'Charlie Parker'의 <Anthropology>


 이로부터 연주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이 가진 모든 음악적 에너지를 쏟아내기 시작하며 그들 내에서 과열되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고 어렵게. 더 어려운 코드로, 더 복잡한 멜로디로 연주했다. 다른 연주자들을 "찢어 버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역량을 확인하고 확장시키기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가장 화려하게 활용할 수 있는 언어인 음악을 통해서 말이다.




 당시 흑인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포텐셜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통제감과 주도권을 확립해나가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당장 생계의 이유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가지러 매일 밤 모다. 뒷골목에 있는 클럽에선 모두가 어우러져 자신들의 가능성을 확인하며 서로에게 찬사를 보내기에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몸으로 전율하며 말이다.


 당시, 뒷골목 클럽으로 향하지 않았던 이들이 위와 같은 음악 현장에 대하여 폄하하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들의 무대가 '뒷골목'이었기 때문에, 당장 이해할 수 없었던 비밥의 심오한 세계가 마치 음악 전통을 무너뜨린 것으로 치부하여, 다소 거칠어진 음악들을 폭력적으로 이해하는 일들 말이다. 음악의 발전은 늘 인간의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왔으며, 전통을 간직한 인간들이 삶 속에서 아파했던 경험을 공유하게 되면서 시작 되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꼭 한번 다루어보고 싶었다. 어떤 이의 성향이나 인격을 알아보기 위하여 '평소 듣는 음악 및 선호 음악을 살펴보는 것'이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커뮤니티 상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럼 동요를 듣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며, 트로트를 듣는 사람은 촌스러운 사람인가? 클래식을 듣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고 부드러운 성향을 가졌으며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인가?

 먼저 이야기하자면 플레이리스트나, 선호음악을 통해 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누군가가 감히 '이 음악은 [내가 들어서] 슬프니까 누구에게나 슬픈 음악이라고 느낄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어떤 범용적인 목적 하에 특수하게 고려한 음악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음악을 듣는 개인이 '직접' 판단하면 된다. 아주 주관적이며 상대적이며 느낌적으로 말이다.


 메탈을 듣는 사람은 내재된 성향이 폭력적이고 거친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메탈이라는 음악이 가진 요소와 에너지까지 쉬이 누릴 수 있는 높은 에너지를 지닌 사람일 뿐이다. 취향에 어울리는 음악이 아니라고 하여 그 음악을 통해 다양한 혜택을 얻는 이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또는 흔히 우리가 '고상하다'라고 표현하는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들을 듣는 이를 격이 높은 사람, 교양 있고 유식한 사람으로 막연히 떠올리는 것도 옳지 않다. 개인의 성향과 인격은 이에 직결된 행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선호하는 음악 장르에 따라 그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에게 솔직해지면 된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음악이 있다면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충분히 즐기면 된다. 음악치료를 공부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런 상황일 때 무슨 음악을 들으면 좋아?"였다. 이에 대하여 나의 대답은 늘 같았다. "지금 듣고 싶은 거."


 음악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듣고 싶은 거, 당장 몸이 전율하는 거. 그게 너에게 필요한 음악이야. 걱정 말고 다 들어. 막 노래하고 연주해. 음악은 결코 너를 해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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