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안 Feb 25. 2024

감정의 이름들

"우리 좀 약간 아플 때가 있잖아."

"어디가?"

"몸이든 마음이든 어쨌든 좀 아플 때."


내 말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는 듯 눈동자를 맞추는 영준.


"보통은 어디가 안 좋아서 아프잖아. 그런데 좋아서 아플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론 일부러 더 아프고 싶어서 아플 수도 있고,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은데 아플 때도 있어."


영준의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겨있다는 게 좋다. 집중하는 눈동자를 따라 단정하게 뻗은 눈썹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섬세한 얼굴 근육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것이 예쁘다. 그 눈썹 위로 검지를 올려 결에 따라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대신 검지를 나의 가슴 위에 올려 쿡쿡 쑤시며 말을 잇는다.


"콕콕 쑤시듯이 아플 때. 찢어지듯이 아플 때. 묵직하게 아플 때. 눌린 듯이 아플 때. 또는 이 모든 것을 다양한 버전으로 아플 때."


나의 말에 따라 움직임을 바꾸는 검지 손가락을 보던 영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나 다양하게 아픈 거야?"


진지한 그 물음에 나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린다. 사실 이 웃음은 네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부터 내 마음속에서 간질거리던 것이었다.


"그래, 아프지. 사는 게 이래. 몽땅 다 망했어. 몸도 마음도 뭐 어쩌고 할 것 없이 다 이 모양 이 꼴이야. 더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어. 미워해서 아프고, 미안해서 아프고, 고마워서 아프고, 보고파서 아프고, 생각나서 아프고, 잊으려고 아프고, 괜찮으려 아프고, 괜찮아서 아프고. 솔직히 이 정도라면 살아있음 안돼.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인 것이지."


영준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하나 빼서 마치 본인도 치통이 있는 사람처럼 제 볼을 감싸 쥔다. 제 딴엔 진지한 표정. 나의 말을 귀담아듣고 성의껏 대답을 할 요량일 것이다.


"그렇게나 많고 복잡한 일들을 몽땅 모아서 아프다는 말로 퉁치고 있는 건 아니고? 그리고 죽긴 왜 죽어. 숨만 붙어있다면 줄기차게 살아야지. 그래서 사람이지. 콧구멍에 힘 딱 주고 숨 들이마시면서 살아가야지."


영준의 말이 끝나고 나는 가만히 나의 코 끝에 머물던 차가운 공기를 가득 들이켠다. 얼굴 가득히 퍼지는 숨에 네 언어들이 함께 울린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 영준의 어떤 동의의 절차와도 상관없이 마음껏 그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마음. 잠시 스치는 미묘한 슬픔에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나에게 아직 눈을 거두지 않은 영준에게 이를 들킬까 두려워 다시 집중한다.


"그래. 숨 쉬는 건 공짜니까. 좋아, 나 숨을 크게 쉬었더니 좀 나은 것 같아.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썩은 산소들을 지금부터 마시는 상쾌한 산소로 바꾸고 이 꿀꿀한 기분을 다 날려버릴 거야."


정신없이 와다다 쏟아내는 나의 말에 영준은 드디어 피식 웃는다.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지는 입꼬리.


"이제야 솔직하네. 기분이 별로 안 좋았던 거잖아. 그러면 기분이 별로라고 정확하게 말을 해야지 왜 듣는 사람 놀라게 아프다고 말을 해. 하는 말의 대부분이 다 헛소리야."


"그래 영준아.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내가 그렇게 모든 걸 다 그렇게 퉁치면서 살고 있다? 근데 그게 뭐가 어때서. 편하잖아? 모른 척할 수 있잖아! 그냥 그런 마음도 있을 수 있는 거잖아. 그래도 괜찮은 거잖아!"


"그래도 괜찮지. 그렇지만 난 네가 덜 혼란스러워했으면 좋겠어. 덮어두는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갈겨놓고 아무 곳에나 던져두면 그 이름이 진짜 필요할 땐 뭐라고 하려고."


옳은 말만 하려고 집중하는 것이 꽤 얄밉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냐.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게 어려운 거지. 합죽이처럼 질끈 닫은 내 입을 본 영준은 주섬주섬 사탕을 하나 물려주며 자신의 손을 나의 어깨 위에 얹고 말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네 마음을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인터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무렇게나 던져두는 그 이름들이 사실은 어떤 이름이었는지 다 알진 못해도 그걸 같이 찾아가는 게 즐거워."


나도 다 안다. 영준 앞에서 자꾸만 토라진다는 걸. 그런 모습까지도 영준은 다 받아준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네가 뭘 알아, 나도 모르는 나를 네가 어떻게 알건데."


"네게 관심이 있고, 늘 궁금하고, 너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어쩌면 네 감정의 이름을 찾아주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그렇게 밝혀진 네 진짜 이름을 사랑하니까?"



네게서 밝혀져 나온 나의 모든 감정의 이름들은 사실 모두 낯설다.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욕심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자신을 이런 사람이라고, 이런 마음이라고 잘 이야기하는 네가 있다면 나도 나의 진심을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찾아줘, 앞으로도. 내 이름들을 사랑할 수 있게."


영준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이 좋다. 우리가 눈동자를 맞춘다는 것은 서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네가 나를 앞으로도 어떤 이름들로 부를지 궁금하다. 언제까지고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떤 모양이든 괜찮다. 네가 불러주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떻게든 가득 사랑할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누울 수 있는 나의 방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