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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Dec 15. 2020

누울 수 있는 나의 방을 찾아서

 날이 아주 많이 추워졌다. 이제 더 이상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고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큰 방이라고 불리는 방은 남향치고는 냉기가 돈다. 단열시공이 잘 되지 않은 건지, 옆 건물에 해가 가려져 온기가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집주인은 방의 모서리에 거뭇하게 피어난 곰팡이를 보며 '환기를 자주 시키고, 해가 들어오게끔 하라'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하루에 고작 30여분 스쳐가는 햇빛으로는 역부족일 테다. 추후 전세가 올라 쫓겨나는 판에 벽지를 보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먼 어쩌나 걱정이다. 그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습기를 왕왕 틀어놓는 것 밖에 없다.


 덕분에 작은 방으로 잠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작은 방은 진짜 작았지만 가장 따뜻한 구역이다. 흠이 있다면 보일러가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자주 시끄럽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도 어쨌든 찬 공기에 코가 시려 잠이 깨는 일은 없으므로 적당히 넘긴다. 자연스러울 수 있는 소리라며 스스로를 무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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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중에 왠 젊은 남자가 인도를 내버려 두고 차도를 비틀거리며 걸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무단횡단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차선을 따라 쭉 걸어가기에 '저 인간이 혹시라도 차에 치여 죽으면 어쩌나' 하고 멈추어 서서 잠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차가 가까워지는 시점에 기가 막히게 자신의 몸을 틀어 위험을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용케 피한 건가 싶었는데 두 어번이 더 반복되니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저 새끼 왜 저래. 괜한 사람 인생 망치려고 작정을 했나.

 

 그래도 혹여나 위험할 상황이 불안해 지켜보니 시선을 느낀 남자는 인도로 올라온다. 강한 칼바람이 후욱 들이치는 바람에 정신이 든다. 본디 가려던 방향으로 발을 옮겨 걷기 시작한다. 나나 잘 하자. 남이야 알아서들 잘 사는데 나만 또 멈춰 있었다. 시시한 마음인 주제에 씀씀이도 어설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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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운 옷을 입으면 어깨가 아프다. 요즘에는 가볍고 따뜻한 옷이 얼마나 많은데 여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텁텁한 목폴라가 달린 스웨터를 입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하지만 이 옷을 입으면 다들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해준다. 한 철 입으면 테가 나빠지는 옷인 주제에 딴엔 비싸게 주고 샀다. 현금으로 사면 할인되냐는 말을 못 해서 수수료까지 책정된 것으로 보이는 금액을 전부 계산했다. 겨울옷은 원래 비싸다며 왠지 허한 마음으로 옷 봉지를 달랑이면서. 폴리가 많이 들어있으면 싼데, 약간의 울이 들어가면 가격이 확 뛴다. 내가 인기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나의 삶도 약간의 울이 함유된 스웨터처럼 어정쩡하기 때문이다.


 연말은 늘 두렵다. 시간이 허락된다는 건 괴로운 일인 것 같다. 허락이 떨어지면 감당해야 할 것이 생긴다. 두렵다. 나는 스스로를 아주 잘 알면서도 나이만큼의 나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의 연말은, 스웨터보다는 가볍지 않을까. 반팔을 입은 채 땀을 닦으며 혈기왕성하게 맞이하는 새해는 어떤 에너지를 발산하게 할까. 괜히 웅크러진 나의 등이 스스로에게 짓눌려 무너져 버릴 것만 같다.


 작은 방에 눕는다. 웃풍 없이 온기를 잘 담고 있는 공기가 포근하다. 매트를 켜 이불속을 따끈하게 달군다. 어깨의 힘을 빼고, 긴장도 풀라고. 다리를 휘저어 이불을 정돈하니 스치는 감촉에 온기가 있다. 힘이 풀리고 졸음이 와 움직임을 멈춘다. 지금은 왠지 보일러 소리도 덜 거슬리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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