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안 Apr 24. 2024

언젠 뭐 안 피곤 했을까?

몸이, 마음이, 약해졌을 때엔,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조금 무리되는 나날이 이어진다. 마치 운동을 아주 오래 쉬었던 운동선수가 다시 마음을 먹고 러닝을 시작하는 것처럼 아주, 몸이 무겁고 고된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어떻게 나에게 이 상황에 대해 납득을 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꺼내든 나의 말은 이 정도밖에 못되었다.


"언젠 뭐 안 피곤했을까?"



본래 타고난 체력이 그리 강하진 못하여 늘 악바리로 살아내야만 본전을 할까 말까. 뭐 그즈음으로 살았다. 아등바등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내가 본래 어떤 호흡으로 가야 어울리는지에 대한 감도 아주 잃어버렸다. 엄마는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에 겁을 낸다. 왜 그렇게 거칠게 일을 하냐는 말을 결국 내게 한다.


"왜긴 왜겠어요. 그렇게 해야 일을 끝낼 수 있으니까 그랬죠 뭐."



오늘처럼 비가 죽죽 내리는 완전한 저기압인 날에는 괜히 더 우리-한 통증으로 인사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아이고, 드디어 또 때가 되었구나. 하고 진통제를 주섬주섬 챙긴다. 이젠 알약 꼴깍 삼키는 행동 따위 일상이 되어버린 강한 어른이 된 나는 이 허리를 다쳤던 스무 살 때를 아쉬워한다. 적당히 아프다 적당히 갔으면 좋겠는 통증. 새로 시작한 일들이 이 통증 때문에 어려워진다면, 그건.. 정말 많이, 속상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스무 살 때 알바를 적당히 했다면 이 허리를 보전할 수 있었을까? 그럼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녔겠네. 그런데 뭐 나만 그렇게 살았을까? 다 그런 거지."




-


삼땡이 된 지도 벌써 4월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오늘, 아직까지도 스스로에게 유연하게 건넬 말을 잘 모르겠다. 여유를 살아가는 그런 일에 두려움부터 가지는 것이 당연한 요즘을 살며 스스로에게 가혹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위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전히 참 소극적이라는 것을 마주한다.


아, 이것도 내 욕심일 수 있겠다.

심지어 나를 다룰 때에도 "잘"해야 한다는 그런 사고방식.

... 지쳐온다. 오늘도.


그냥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해 편해진다면 좋겠다. 나의 어떠함에 대해 약간은 무심하면서도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갈며 아득바득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지난날의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오늘의 내가 참으로 충분히 무안을 준다.


그저 쭉쭉 삶을 살아가겠다고 복받쳐 오르는 소리를 주먹 따위로 입을 가리고 틀어막으며 지내온 날들이 민망하다. 뭘 그리 거창한 삶을 꿈꾸며 그리 살았던 것일까. 그래서 사람은 판단을 잘해야 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의 에너지로 영위해야 하는지. 결국 이것은 지혜의 문제이다. '나'라는 지혜의 항아리에 손을 넣으면 딸딸 긁히는 소리만 청아하다.



그래서 악바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람이 죄다 빠진 마음밖엔. 쭉쭉 나아가며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 같다가도, 덜컥 겁을 먹고 뒤돌아 나의 지난 발자국이 바로 코앞일 수 있다는 그런 겁박을 하는 것 밖엔.




그래서, 오늘처럼, 몸이, 마음이, 약해졌을 때엔, 딱, 이렇게만 말하려고 한다.

이것은 내게 꺼내드는 오늘의 나의 최선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언젠 뭐 안 피곤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