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안 May 11. 2024

어렵지 않은 사형선고

잘해오던 것도 왜 이리 엄두가 안 날까,라고 떠올리는 순간.

내가 진짜로 '잘' 해오던 것이 있었는지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이내 곧 사형선고가 떨어진다.


잘해오던 것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떠올렸던 것일까.

진짜로 '잘', 그러니까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게 잘'했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냥 꾸준히, 거침없이 한다는 '잘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의미로 '잘해오던 것'에 대한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 방금의 재판에서 내려진 사형선고는 잘못된 판결이구나. 괜히 나를 조급히 죽여버린 것이다. 나는 '뛰어나게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침없이 '잘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럼 다시 재판을 연다. 꾸준히, 거침없이 '잘한다'는 성립이 되었는가. 아 그것은 성립이 된다. 머리 위로 그린라이트가 잠시 켜졌다가 곧 꺼진다. 꾸준히, 거침없이 잘하는 것은 나의 장기이자 특기이다. 약간의 중독적인 성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에 집중하여 시간을 후루룩 삼키고 그것에 대한 결과물을 만들고 나면 그제야 배가 부르고 안심이 된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날은 나의 무능력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다. 너어는 그 모양 그 꼴이니까 그것 하나도 꾸준하게 못하겠지. 한심한 꼴을 좀 보아.

아, 이 말은 내가 스스로 된 나에게 직접 떠올리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결코 이렇게 말을 하진 않는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칼 맞아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아,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자꾸만 칼을 겨누었던 것이구나. 글을 쓰면서 직접 보고 있으니 꼭 남이 만든 결과물을 보는 것처럼 객관적인 눈을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글을 쓰는 것이란 정말 무섭다. 그래서 상담 중 직접 글을 적는 방식으로 중재를 진행하기도 한다. 마치 길 없이 흘러가는 바람처럼 마구잡이로 돌다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토네이도로 스스로를 휘몰아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문답의 형식이든 자유의 글이든 글씨로 생각을 적으며 그것을 마주할 때 그 모양새가 어떠한지 본인이 직접 보게 하는 것이다. 결국 끝이 파멸일지라도 그 템포를 조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 결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든지 그렇게 하지 않든지 그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적어가는 것이다. 얼굴을 당겨 마주 보도록 판을 깔아보는 것이다.


과호흡(overbreathing)이 왔을 때 일단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숨이 막힌다고 해서 자꾸만 새 숨을 들이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숨을 쉴 때 무조건 다량의 깨끗한 산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량의 산소 또한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 혈액에는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적정농도가 있고 우리의 신체는 그 농도를 항상 유지 및 조절시켜 건강한 지표를 킵고잉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긴장하게 되면 조절능력이 상실되어 과호흡이 발생될 수 있다.


뭐, 과호흡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조금 괴로운 상태가 긴 시간 동안 유지가 될 수는 있지만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때 재빨리 봉투를 입에 갖다 대고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다시 들이마시는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데, 괴롭다고 응급실에 가면 결국 동맥혈 가스검사를 실시하게 된다. 혈중 농도에 얼마만큼의 이상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손등에 시퍼렇게 보이는 핏줄을 채혈하는 정맥채혈과 달리 동맥은 쉽게 생각해서 손목 안쪽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위치인데 손목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깊-게 바늘을 넣어야만 채혈을 할 수 있다. 의사들이 주로 실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피를 '뜨겁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뭐 문학적으로 열정적인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동맥채혈 시 느껴지는 피는 벌컥벌컥 흐르며, 진짜로 매우 뜨겁다. 고통이 생각보다 아주 아주 아주 굉장하다. 응급실에 입장할 때는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지만 동맥채혈을 시작하는 순간 그 난리법석을 떨던 과호흡이 순식간에 물러가고 엄청난 통증을 통해 오히려 정신을 아주 바짝 차리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아픔으로 아픔을 이겨내는 것. 좋은 방법이다. 나는 연애와 연애 사이에 공백기가 짧은 사랑 방식 또한 대찬성하는 편이다. 사랑으로 사랑을 이겨내는 것이지. 참 아름다운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연약하고 또한 악하기 때문에 어차피 스스로를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나쁜 짓들을 하게 되어있다. 나쁘게 막 환승연애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든, 공부를 통해서든, 취미를 통해서든, 일을 통해서든 자신을 위한 가장 적절한 일들을 스스로가 애써 해야만 한다. 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나는 공백기가 짧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좀 해봤어야 했던 것 같다. 사랑도 많이 해보아야 한다.


어쨌든. 그러니 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숨을 쉴 때도 천천히-깊게 숨을 쉬어주어야 하고. 자신에 대하여 떠올릴 때도 칼을 쥐고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 익숙해버려서는 결국 남을 대할 때에도 사랑이 아니라 칼을 쥐고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내 얘기가 맞다. 잘못한 거다.


너그러움과 여유는 사실 좀 타고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부모가 중요하다 어쩌고 저쩌고도 중요하겠지만 원체 타고난 성미가 중요하더라. 그리고 자라온 동네 분위기도 그렇다. 생각보다 경기권 밖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발견한 것으로 그들에게 체화되어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어느 정도의 '여유'가 탑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로는 -뱃심-이라고 하던데. 아, 물론 그들 중에서도 화르르륵 타오르는 성미의 이들도 있긴 했지만 좀 쪼그라지고 눌러서 산다는 느낌을 주는 이들이 나의 주위에는 없었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의 주위에는 없었다. 일반화 아니다.).


하아- 그래서 오늘 드는 이 고민은 좀 '아 요즘 좀 이렇구나-'하고 넘기는 일에 익숙하거나 능숙하기까지 해두어야 한다는 거. 심각한 건 이 자체도 '뛰어나게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또 소름이 돋았다. 미쳤다. 이건 욕심일까, 심보가 못된 것일까. 꼴을 못 보는 거다. 반성해야 한다.


뭐 아무튼,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하는 게 없는 나인데 이제는 심지어 꾸준하게 '잘하는'것도 못한다고 꾸중하다가는 사건이 심각해져서 나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항상성의 특징은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절'한다는 것에 있다. 항상 유지해야 하는 기준이 되는 상태를 스스로가 알고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레이더를 늘 돌려놓고 있는 것. 그리고 돌려놓고야 마는 것.

넘어져서 찢어진 피부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애쓰고 그것을 이루어놓고야 마는 것. 피가 평생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결국은 그것이다. 마음에도, 내가 나를, 또는 내가 타인을 대하는 사고방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변화를 인지하고 있는 것,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는 것, 과도하게 몰아붙이지 않는 것, 과도하다면 그것의 템포를 늦추거나 잠시 멈추도록 해야 하는 것. 줄줄 흐르고 있는 피를 백만 년 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사는 것이 쉽지가 않다. 외부적인 일들로도 매일 싸워가기에 정신 사나운데, 이제 보니 스스로의 마음도 내 안에 있지만 나의 것 같지가 않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삶이라는 것을 살면서 매 순간을 잘못된 것임으로 느끼는 게 사실은 당연하고 그것이 정상인 게 아닌지. 그렇다면 아픈 것이 당연한 것. 잘못된 것임을 느끼는 것을 당연하게도 매일 해야만 하는 것.


태어나는 것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는 것은 선택과도 상관없이 누구나 당연히 겪는 것이라면 사실 사람은 죽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건 당장 무언가 발전을 이루어 죽음과의 전쟁을 선포하여 이겨내고 쟁취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닌. 그냥 하루에도 수천만 번 셀 수도 없이 눈을 깜빡이는 일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 테다. 그러니 마음에 드러나는 생각들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맞겠다. 어차피 이것들은 죽음이 반사되어 나에게로 비추어진 잔상일 테니. 죽음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 대하여 대단한 끈기와 욕심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음에 대한 반감은 딱히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곧 죽어보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오늘은 내가 하루종일 정-성스럽게 마련한 다가올 죽음에 대한 제물이며, 그 값은 평생으로 치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이 다 밝아지는 날이 오겠지. 그것은 죽음으로 만나게 될, 삶보다는 죽음과 더 가까운 상황일 것이라는 나의 확신이며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위해 꺼내드는 위로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젠 뭐 안 피곤 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