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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안 Aug 24. 2016

많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사람이 첫 숨을 틔우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냥 생각 없이 흘러 들어간 페이스북으로 친구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이미 발인까지 끝난 몇 주전의 사건을 이제야 접했다. 사실 그냥 일 년을 같은 반 소속으로 지냈지만 정말 친하지 않았던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하루에 몇 번씩이나 접하는 그냥 '누군가의 삶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 쯤으로 들릴 줄 알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 예상치 못하게도 아주 우연하게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난  두 친구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 친구는 교통사고였고 또 다른 한 친구는 아마 본인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25년간의 삶을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라는 그 자체가 사실 큰 계기도 없었을뿐더러 나와는 무관한 그런 일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사실은 스스로 죽음에 대해서 일종의 '동경'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나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는 비겁한 변명 따위를 늘어놓으며.


 지금은 그러한 불순한 과오가 정말 씻을 수 없는 죄로 다가왔다. 정말 누군가는 미친 듯이 갈망하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 어쩌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던 한 사람이었는데 어찌 되었든 나와 함께 시간을 지냈던 사람이 죽음이라는 이유로 살아감과는 영원한 분리가 되었다는 그 현상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정말. 죽음이라는 건 존재하는 것이구나. 사라졌고, 볼 수 없고, 이 세상과 단절된 그러한 상태가 정말 있는 것이구나. 


 분명 내가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이런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스럽고, 자연스러웠다. 왜냐하면 나이가 있으셨고, 암이 말기까지 진행이 되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투병하셨었고 결국 병이 너무 깊으셨기 때문에. 두 눈에 혼이 나가 사람들을 맞는 친구의 얼굴이 까칠해서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사실 어쩌면 아들 딸 다 키워놓고 가셔서 그래도 정말 대단하시고, 정말 다행이다.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친구들의 죽음이 정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또한 나의 마음에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너무 답답하고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도무지 모르겠다. 너무 안타까웠다. 지난 시간에 내가 그냥 흘려 보았던 너희들의 모습이 사실은 기억을 두드려보니 생각보다 많이 떠올랐다. 단조로운 일상에서도 내뿜는 거친 듯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사실은 너무 부러웠었던 게 기억이 났다. 난 그냥 늘 있는 듯 없는 듯. 그러한 삶의 편리성을 이용하길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만 살아왔지만, 언젠가 너희처럼 완전히 나를 표현하며 사는 그런 멋진 생각도 했었다. 



 생각보다도 많은 생각이 지나치고 지나온 나이 속의 나와 우리의 모습들이 마음에 끊임없이 겹쳐서 계속 어찌할 바를 잃고 결국 나는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이 떠올랐다. 결혼을 해서 아이도 키우고, 유학도 가고, 연기도 하고, 춤을 공부하고, 노래를 하고.. 등등 각자의 삶들을 다들 이어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 모두가 그리고 열정적으로 멋지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늘 회의적인 면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일종의 무기력으로 점철된 나의 시선에 대해 스스로 책망했다. 나는 왜 이렇게 미지근한 사람인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나의 온도에 역겨워져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참 여러모로 마음이 꽤나 무겁지만 또한 내 앞에 살아나갈 알 수 없는 시간이 펼쳐져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꽤나 걱정스러우면서도 그래도 그 자체는 정말 말 그래도 움직임이 있다. 의미가 있다. 그래서 더 그 자체를 인식해야 한다. 숨이 거두어지기 전까지 정말 산 사람에 맞게 살아야 한다. 삶이 하루씩 쌓여갈 때 많은 것들이 오고 감에 있어서 아쉽고, 아쉬워지는 만큼. 차거나 뜨거웁거나 그러한 의미가 주어질 수 있도록.





 

 많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죽음의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흐름 안에 살아갈 것이고, 그 흐름이 사실은 너무나 소중하고 값지다는 것. 우리가 첫 숨을 틔우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때까지 정말 우리의 삶의 많은 의미들을 찾는 그런 행운이 주어지는 시간을 만났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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