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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크티 라떼 Aug 19. 2022

믹서기 고치는 아저씨

아저씨의 참견이 감사하다

팥빙수를 해 먹고 싶은데, 믹서기가 말썽이다.

오 년 전 아주 잘 갈린다는 상품 리뷰를 보고 산 중소기업 제품이다. 성능이 좋았다. 과일이나 마늘도 잘 갈렸고 여름에는 얼음도 잘 갈렸다. 나의 믹서기는 아래에 모터가 있는 본체와 강화 유리 안에 칼날이 장착된 분쇄 용기로 되어있는 보통의 믹서기이다. 문제는 둘째 아이가 다이얼식 버튼을 아주 신기해한다. 돌리면 다이얼 안에 네온 색 불이 들어오고 돌릴 때마다 단계가 달라져서 유리로 된 용기 안에서 분수처럼 내용물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이얼식 버튼을 감싸고 있던 플라스틱 원형 틀이 빠졌다. 잘 두었다가 쓸 때만 꽂아서 썼는데 점점 헐거워지더니 아예 끼워도 돌려지지도 않고 손에 찌릿찌릿 전기까지 올랐다.


 할 수 없이 에이에스센터에 전화를 했다. 목소리로는 오십 중후반의 아저씨가 받으신다. 오 년이나 된 제품인데 부품이 있으려나 걱정을 하면서 믹서기의 상태를 설명하였다. 아저씨는 구매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물으시면서 본체를 보낼 때 분쇄 용기 칼날도 보내라고 하신다. 왜냐고 물으니 칼날이 벌써 많이 닳았을 거라시며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꼭 보내라는 것이다. 주소를 불러주시는데 서울 성수동이다. 이게 강화 유리여도 잘 깨지는 유리제품이니 오다가다 부딪쳐서 금이라도 갈까 겁이 나서 못 보내겠다고 본체만 보내겠다고 했다. 그럼 칼날을 분리하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해보라 신다. 일단 본체에 용기를 장착하고 왼쪽으로 힘을 주어 돌리면 칼날이 빠진단다. 전화를 끊고 여러 번 해보았지만 안 빠진다. 신랑도 해보았지만 빠지지 않았다.


 나는 일단 전기가 통하는 버튼이나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본체만 꽁꽁 싸서 보냈다. 아침 일찍 택배를 수거해갔고 다음날 오전에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왜 칼날을 보내지 않았냐고 성화시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괜찮으니 그냥 본체만 고쳐서 쓰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저씨는 절대 안 된다신다. 지금 본체는 다 고쳤고 분쇄 용기의 칼날도 교체해야 하니 착불로 분쇄 용기 통째로 보내라 신다. 안 그러면 본체도 안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유리제품인데 오고 가다가 깨지면 나만 더 손해인데 왜 저리 성화실까. 참 고집 있으시다 생각했다. 마침 흔한 택배 물품마다 들어 있던 엠보싱 비닐도 어제 다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 겨울 헌 옷으로 둘러싸고 다시 박스를 오려 싸서 보냈다. 보내면서도 깨지면 어쩔 거냐고 에고 정말 아저씨 고집 못 말리시네 하며 투덜댔다.  하지만 다음날 난 택배를 받아보고 웃었다. 내가 보낼 때 그대로 아이들 헌 옷에 분쇄 용기를 싸고 다시 오려진 박스에 싸서 믹서기 본체와 함께 상자에 담아 보내신 것이다. 꺼내서 돌려 보았더니 기가 막히게 잘 된다. 헌 믹서기가 새 믹서기가 돼서 돌아왔다.


 난 고집 센 수리 센터 아저씨가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믹서기에 애정이 더 붙어서 아침마다 토마토나 검은콩을 갈아먹게 되었다. 거의 매일 믹서기를 쓴다. 시원하게 갈리는 걸 보면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요리할 맛이 절로 난다.  아이들과 얼음도 갈아 팥빙수도 해 먹고 수박도 갈아서 주스도 해 먹으니 아저씨의 고집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 고집이 없었다면 잘 갈리지도 않는 믹서기를 쓰면서 계속 투덜댔을 테고 다시 새것을 사야 했을 것이다. 돈을 아껴서 좋은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 참견을 해줘서 감사하다.


 요즘처럼 다른 사람에게 듣기 싫은 말은 안 하는 세상에 고집스럽게 꼭 분쇄 용기를 보내라고 하시더니 이렇게 편하게 살게 해 주시니 말이다. 잔소리는 참 듣기 싫다. 자기나 잘하지 하는 생각이 바로 든다. 하지만 꼭 들어야 하는 말은 용기 내서 해줘야 하지 않을까. 추운 날 갓난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새댁들에게 들어가라고 하고 책가방 문을 열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주의하라고 말해준다. 춥게 입고 다니시는 어르신들에게는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라 말을 건네어야 된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나 도움이 필요한데 망설이고 있는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하루 종일 아무와도 말도 못 하고 지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관심을 갖는 게 다른 목적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여 조심스럽긴 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과 달리 좀처럼 정을 찾기 힘든 요즘이다. 코로나도 아직 한창이니 더 그렇다. 이렇게 삭막한 시기에 난 고집쟁이 수리공 아저씨 덕을 톡톡히 보았다.

 아마 아저씨도 윤오영 선생님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좋아하셨나 보다.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물김치를 담으려고 사과와 배를 갈고 다시 밥 한 주걱을 넣어 갈며 시원스럽게 갈리는 믹서기를 본다.

와! 잘 갈린다. 아저씨 고집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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