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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크티 라떼 Oct 03. 2022

아버지와 영화감상

토요일의 영화처럼

아버지는 웃음이 많고 다정하신 분이어서 나는 좋은 추억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생각나는 것은 토요일 밤마다 영화감상을 했던 일이다.

TV에서는 토요일 밤에 9시 뉴스가 끝나고 영화를 해줬다.

아버지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시고 혼자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아서 그래도 외롭지 않게 성장하셨다.

결혼 전에는 신앙인으로 목회활동을 주로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어기지 않는 두 가지는 일요일 예배와 토요일 영화감상이다.

항상 출세보다는 화목함을 강조하셨다.


토요일 9시 뉴스가 끝나고 광고를 오랫동안 한다.

그 시간 동안 아버지는 쥐포나 오징어를 구우실 때도 있었고 날씨가 쌀쌀해져서 연탄불을 땔 때는 어머니가 반찬거리로 사다 놓으신 코다리를 구워 주실 때도 있었다.

겨울철 코다리는 꾸덕꾸덕하게 말려 놓았다가 연탄불에 구워 먹으면 조림이나 찌개로 먹을 때 보다 훨씬 맛있다. 그리고 가래떡이나 인절미를 구워서 영화보면서 같이 먹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인절미를 영화나 드라마 보면서 구워 먹는데 아버지의 불 다루는 솜씨를 따라갈 순 없다.

요새 사람들 말로 ‘겉바속촉’하게 구워 주신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솜씨 좋게 구워주신다.

벌써 시작한다고 빨리 오시라고 내가 부르면 껄껄 웃으시면서

신문지에 먹거리를 싸가지고 안방으로 들어오시며 말씀하신다.

“자! 먹으면서 보자.”

가족이 모두 안방 TV 앞으로 모인다.


그때 먹은 코다리와 떡은 얼마나 맛났는지 모른다. 쥐포와 오징어도 금세 동이 난다.

그 후에는 모두 영화에 집중하며 같이 울고 웃는 시간이다.

이불 위에 누워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하얀 뭉게구름 위에 올라가 무지개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같이 모여 즐길거리가 부족한 초라한 서울살이에 유일한 낙이었던 셈이다.

꽃이나 나무를 심고 가꿀만한 마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맛난 먹거리를 만들어 먹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은 이렇게 같이 영화를 즐기며 화목했다.

추리 영화도 많이 해줬는데 셜록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영화한 것을 보고 나면 섬뜩함에 서로 놀란 표정을 하고

“아! 저 사람이 범인이라니 놀랍다.” 말하면서 무서워서 언니들과 꼭 붙어 잤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주로 명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과 <벤허>와 같은 성경책을 영화로 만든 것을 좋아하셨다.

서부영화를 볼 때도 “멋지네!” 하면서 웃으셨다.

<엄마 찾아 삼만리> 같은 슬픈 영화를 보고 나면 서로에게 티슈나 수건을 건네며

가슴 아픈 곳을 위로했다.

아버지의 소리 없는 눈물을 대할 때면 영화보다 더 슬펐다.

언니들이 시험공부를 한다고 안방으로 오지 않고 있으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언니들을 부르신다.

어머니가 말리시면

“맨날 앉아만 있다고 공부가 되는 게 아니야.” 하시면서 말이다.

그럼 우린 모두 연못으로 퐁당퐁당 들어가는 청개구리들처럼 TV 앞에 앉아서 영화를 본다.

역시 시험을 앞두고 보는 영화는 더 재미있다.

우리 가족에게 그런 주말의 영화감상 시간이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서울 생활을 각박하고 빠듯했으며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어쩌다 토요일 영화하는 시간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시면 왜 이리 늦으시나 기다려졌고 늦게 돌아오시면 오늘 무슨 영화가 했는데 내용이 어떠하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귀 기울여 들으시다가 다음 주에는 꼭 같이 보자고 말씀하신다.

“오늘은 OO형님이 영등포 경원극장 앞에서 버스 타려는데 한잔하자고 붙잡아서 못 봤네. 다음 주엔 꼭 같이 보자. 허허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셔서 어머니에게 술자리에 있었던 얘기를 하길 좋아하셨는데 그때 어머니도 영화 속 얘기보다 더 재미있어하셨다. 마치 영화 두 편을 본 것처럼 그 상황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니, 그 양반이 왜 그랬을까.” 하면서 맞장구치시는 걸 보다가

난 이불 위에 눕는다. 눈을 감으면 <OO형님과 아버지>라는 영화가 시작된다.

두 분은 작업복을 입으시고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 어디서 한잔 하자신다.

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신다.

“아! 그래서 말이야!”, “아! 거기 사람들은 이렇더란 말이지!”

영등포의 화려한 밤거리 속에서 작은 포장마차에 두 명의 가장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삶의 무게를 털어 버린다.  

그리고 각자 고단한 삶이지만 이겨낼 힘을 얻는다. 아는 건 없지만 열심히 살아보자 내일은 또 새로운 일이 펼쳐질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토요일의 영화는 아버지의 우렁찬 코 고는 소리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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