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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평 Oct 06. 2024

상경

또는 극락조

 먼발치에서도 시야의 한 켠에 들어오면 금방 찾아버리고 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생각에 가슴이 들끓다가도 이내 초라한 내 모습을 흘겨보고는 기어오르는 좌절감에 허든거리고는 했다. 아스라이 뿜어져 나오는 버스의 한숨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문득 창밖을 바라보면, 멍한 표정으로 신호를 기다리던 그 사람의 모습을 오랜만에 마주쳐 괜스레 반가워져 뚫어져라 쳐다보는 순간들도 있었다.


 어떤 일들은 막을 수 없는 전철처럼 걷잡을 새 없이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어찌해야 할지 생각해 볼 도리도 없이 무방비하게 손을 뻗어보아도 이미 전철은 그 뜨거운 열기와 칼바람만을 남겨둔 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갈 곳을 잃은 두 손은 무력감만을 끌어안고, 나를 지탱하던 두 다리는 풀이 죽어 나자빠진다. 뻔한 이야기다.


 멈출 줄을 모르는 화로처럼 불타오르는 이야기를 꿈꾸던 적이 있다. 세간의 한파에 벌벌 떨어대더라도 구태여 그 사람의 곁에서 걷고자 했다. 서로 내어줄 겉옷조차 잃어버린 채 한참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발치에서 함께 거닐다 보면 언제인가 커다란 화롯불을 찾아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작은 불쏘시개랄 것도 없어서, 매섭게 뻗어든 서릿발에도 잦아들고야 마는 왜소한 모닥불 따위에 의존해버리고 만 것이다.


 얼마간 산산조각 나버린 세월의 편린을 주워 들고는 허공을 향해 휘둘러대는 치졸한 그때의 내 모습이 다시금 창가에 어렴풋이 새겨졌다. 세게 쥐어들수록 손바닥 주름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편린의 그 끝으로, 검붉은 핏방울이 맺혀 떨어지며 너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게 문제인 겁니다. 도대체 왜 나는 선지에조차 없는 겁니까? 왜 혼자 성인인 척, 착한 척 다 해대는 거예요. 그럼 나는 뭐가 됩니까? 아무런 연관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겁니까?"


 "처음부터 우린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어요."


 너의 공허한 두 눈의 끝이 향한 곳은 내 눈도 아니고, 빛바랜 천장도 아니며 별빛 한 점 없는 밤하늘도 아니었다. 그저 이 세계의 끝을 출발선으로 삼은 건너편의 세계였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방금 막 죽어버린 생선처럼 몸이 파르르 떨리며 이내 소리 없이 차분해졌다.


 뻔한 이야기였다.




 늘 살아 숨 쉬는 작은 것들이 필요했다.


 연신 콜록대며 앓은 일이 잦았던 모퉁이 자취방에는 작은 극락조 한 아이를 들여놓았다. 아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끼니를 챙겨 먹는 동네에서 함께 숨 쉬는 무언가가 있음 싶었다.


 밤거리는 차갑고 스산해서 여차하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낮에는 차가울 새 없이 따뜻해진 날이지만, 해만 졌다 하면 기온이 뚝 떨어져 버린다. 별 한 점 없는 밤하늘이라 햇빛이 사라지고 나면 홀로 빛낼 수 있는 점 하나 없더라. 그래서인지 벌벌 떨지 않으려면 반나절 뒤에 찾아오는 햇빛만을 기다려야 한다.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은 망각을 위한 해무 같았다. 사람들은 온통 이곳에서 숨 쉬고 있는데, 구갈동으로 내려가면 30분을 내달려도 아는 사람 한 명 없으니 그곳에서의 후회와 자책과 좌절과 자기 파괴와 자기혐오와 고독함은 모두 온전히 푹 찔려 들어올 내 몫이었다. 두려웠다. 낯익은 얼굴들에 파묻혀 사라지고 싶었다. 작년 여름의 기억이 한 켠에서 서서히 기어올라와 소스라치도록 끔찍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할수록 문제가 더 꼬여만 가고 그 매듭은 온종일 내 목을 쪼여온 반년도 전의 기억이 있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이 받은 경기 어린 시선 같았던 그의 눈빛이 선명히 초점에 박혀버려서, 어디를 내다봐도 그 날선 눈빛만 보였다.


 아무렴 눈을 씻어버려야만 했다.




 심장이 언제 멈추어버릴지 모를 불안감에 밤을 지새운 날이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으면 둔탁한 맥박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곤 한다. 이따금씩 세월에 힘없이 털털대는 엔진 소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언제든 맥을 잃고 멈춰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엔진이 내 가슴에 박혀있다.


 가끔씩 제 풀에 다리가 꼬여버린 무희처럼 쿵—하고 어색한 박자에 맞추어 뛰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홑이불을 이마 언저리까지 들어 올리곤 한다. 맥박이란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못 볼 꼴을 보여준 듯 한 없이 부끄러워지고 만다. 동물이라면 누구나 실수하지 않을 간단한 박자 타기에 이토록 고전하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인양 너스레 떠는 학생들, 술에 절여져 비틀거리는 퇴근길의 아저씨들, 곧 죽을 듯이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는 노인네들까지. 이들 모두가 심장만큼은 제 박자에 맞추어 제대로 뛰고 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가슴이 조여 온다. 속이 찌릿거린다. 똑같은 트랙 리스트에서 음악을 뒤적거린다. 어딘가 공허한 가슴에 손을 휘저으며 잡아낼 무언가를 기다린다. 한참을 휘적이며 이내 내려놓는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풍화된 기억, 흘러간 사치, 엄습한 초조함. 모두 나만의 것이다. 나만이 오롯이 안고 간다. 언제인가 아버지는 차에 치여 인대를 다쳤다. 별안간 테이블쏘에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뇌 속 혈관이 터져 장애를 얻었다. 어머니가 짊어진다.


 전화를 한다. 어머니가 흐느낀다.


 “길을 걷다가도 울컥해.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나. 눈물이 뺨을 내달려도 우걱우걱 밥을 씹어먹어.”

 “그렇구나.”

 “아빠는 괜찮아지고 있어.”

 “그렇구나.”

 “미안해.”

 “미안할 게 뭐 있어. “

 정적이 흐른다.

 ”그래, 잘 지내렴.”


 다시 가슴이 조여 온다. 흐느낀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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