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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평 Oct 08. 2024

유예된 용기와 소금물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말들

매 시간이 과거가 될 때 나는 모든 과거가 부끄럽다. 늘 애써 떳떳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지만, 순간들은 흘러 속절없이 부끄러워진다. 질책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나는 나의 불완전성을 느낀다. 어떤 말들은 내뱉어서는 안 되었고, 어떤 말들은 삼켜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들을 가려내는 용기는 늘상 당시에는 없고 지금은 있다.


 그렇게 용기는 유예된다. 나는 다시금 순응하는 마음이 되어 생각한다. 긴 시간 유보되어 가려지지 못할 말들은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낫다고. 때로는 뱉어내어, 때로는 들이 삼키고 마는. 안과 밖, 그 어떤 목적지도 정해지지 못한 채 그저 소멸되어.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소멸, 그로부터 무언가를 되찾아 완전해지리라.


 그러나 나의 이런 치기 어린 반항은 끝내 내재된 모순 속에서 막을 내렸다. 소멸은 명실상부한 상실이며, 상실은 나와 너로 하여금 슬픔을 안긴다. 사라진 말들을 애도하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장례식에 가기를 주저하는 어느 광대처럼. 너에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은 또다시 유예되는 용기에 억눌리고 만다. 목적지를 잃은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깨달으며.


청사포마을의 초입


2020년의 여름을 나는 그때의 투명했던 공기만큼이나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나고 자란 해운대는 마침 봄의 태동을 지나 녹음이 생장하는 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집 앞 화단의 꽃과 풀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제각기의 충만함을 뽐내려 안달이었다.


 그 시절 나는 바야흐로 미술대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반복되는 붓질에 데식어 있었다. 유난히도 선선했던 주말, 정체 모를 고양감에 이끌려 현관을 나섰다. 우거진 가로수 이파리 사이로 잘게 부서지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청사포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갑과 수첩만을 든 채로.


 청사포는 해운대 끝자락 와우산에 의해 가려진 작은 바닷마을이다. 그곳의 공기는 유난히 푸르렀으므로 나는 이따금 그 산이 어린 마음에 혼자 그곳을 독점하려 숨기고 있던 것은 아닐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그만큼 그 마을이 내게 주는 감동은 완연했었기에.


 마을로 들어서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등지고 서있는 가파른 언덕길뿐이었다. 나는 배차간격이 널찍한 녹색의 마을버스를 타고 가고는 하는데, 늘 사람이 한적했었기에 가장 좋아하는 좌석에 앉아 여유롭게 갈 수 있었다. 버스가 언덕의 정상을 넘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딛는 순간, 구태여 맨 앞 좌석에 앉은 내 두 눈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너른 바다와 다소곳이 내려앉은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찬다. 육중한 버스가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찰나, 그 찰나에서 나는 마치 저 큰 바다로 투신하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들뜨고는 했다.


 누군가를 치유하는 것들은 모두 땀, 눈물, 바다와 같은 소금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아지랑이로조차 가늠이 채 되지 않을 한여름의 열기도 망각한 채, 마을의 골목골목 사이로 숨어들며 눈물을 셈하고, 땀에 잠겨, 바다를 탐했다. 미처 해거름이 드리우기 전까지 햇빛이 비추는 모든 물질을 담아두고자 했다. 수백 년 된 망부송의 제단 밑을 거닐며 나 없던 세월을 가늠했다. 이끼 낀 바닷돌을 조심스레 밟아가며, 마치 그것이 수많은 거북의 등껍질이라도 되는 양 미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바다를 접했다.


 말을 빼앗긴 채 즐기는 배회는 그 자체로 치유였음을. 짐짓 소멸해버리고 마는 말들은 그렇게 생겨나지도 않는다. 태어나고 죽기만을 반복하는 나의 말들은 그렇게 안식을 되찾는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껴안은 모든 것들은 끝내 내게 말을 청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차츰 열기가 가라앉고 매미가 울음을 그치던 저녁녘,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문득 다짐해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용기를 유예하지 않겠다고. 무언가를 가려내지 못하여 그 자체로 굳어버리는 회한에 생의 한 순간을 허든거리지 말자. 태어나는 말들을 수면 아래 가두어두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온 마을은 땅거미가 차분히 내려앉아 또 만나게 될 나를 한참을 배웅해 주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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