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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언어의 정원을 보며ㅡ

by 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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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항상 생각나는 애니 ㅎㅎ

처음 봤던게 13년도...? 15년도..? 였나 ㅠㅠ

세월 무상




아무래도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영화를 시청할 때도 개연성이라든가, 캐릭터 설정이라든가, 떡밥 회수, 세계관 등등을 생각하게 된다. '아 이건 좀 억진데?' 싶기도 하고 , '와, 스토리 진짜 잘 짰다!' 감탄하게 되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영상이 소설과 달리 특별한 점을 꼽자면, 여백의 미.

개연성이 부족하고 설정이 빈약해도 오히려 그래서 더 재미있고 감동적이게 된다. 개인적으론, 언어의 정원이 그렇지 않나 싶은데. 미성년자, 심지어 학생과 교생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적절한 감수성과 영상미, 음악으로 일말의 논란을 잠재운다.

소설이었으면.... 어땠으려나. 성별이 바뀌었다면 또 어땠으려나.... 싶다.



러닝타임이 45분이라고 하는데 체감 20-30분 정도! 그만큼 재밌고 여운이 남는다. 사실 감동...?은 크게 모르겠다. 애초에 감정 이입하게 만들어 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은 남주, 여주. 사실상 두 사람이 전부!

남주는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학생.

미래에 조급할지언정 불안감은 없다.


여주는 미숙하고 여린 선생님.

직업은 있지만 방황하고 있다.

(큰 주제로 보면 레옹과도 비슷한듯)


그렇지만 교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교외에서. 학교 밖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전개된다.



줄거리는 뭐...



남주의 꿈은 구두 디자이너. 그렇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데다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한다. 게다가 어머니와 형을 돌보느라 24시간이 바쁜데.

그런 남주에게 허락된 자유 시간은 비가 내리는 오전뿐. 남주는 비가 오는 날이면, 1교시를 빠지고 공원의 정자로 간다. 그곳에서 구두를 스케치하는 것이 남주의 유일한 낙인데. 여느 날처럼 비가 내리던 날. 남주는 정자에서 웬 여자를 맞닥뜨린다.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봤을 수도 있어요."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여주는 뜬금없이 만엽집 (일본 고전 시가집)의 한 구절을 읊고는 사라진다. (신비로운 사람에게 끌리는 법!)

이후 장마가 시작되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가 오는 날마다 정자에서 만나 담소를 나눈다. 그럴 수록 점차 남주는 마음을 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꿈과 미래를 고백한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데. 장마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만남도 기약 없이 미루어지는 듯하다가 ㅡ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맞닥뜨린다. 알고 보니, 여주는 국어 선생인데, 최근 일진 여학생의 계략 때문에 학교에서 퇴출된 것이라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남주는 일진을 찾아가 뺨을 때리고(!)









여주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남주는 겨우 15살.......!! 여주는 이사를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고. 남주는 홧김에 울분을 쏟아낸다.












"내가 같은 학교 학생인 걸 알면서 왜 말 안했어요!"




표면적인 분노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나를 어린애로만 생각한 거지?', '자기 얘기는 솔직히 털어 놓지도 않고 내 얘기만 캐묻냐' , '넌 그렇게 평생 혼자 앓기만 할 거야?' , '내가 그랬듯 너도 네 고민을 말해줬다면....' 등등을 말하는데,




'너에겐 내가 위로가 되지 못했어?'ㅡ라고 묻는 것 같더라.




팩폭에 두드려 맞고 울컥한 여주도 진심을 표현하는데ㅡ 여기까지가 줄거리.













당연히 여주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남주가 너무 어리니까!! 하지만 어른스럽고 자신을 챙겨주고,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해준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열린 것 같다.


이후 남주는 공부에 전념하면서 조금 더 준비가 되면, 여주를 찾아가겠다며 독백한다. 크으~~ 멋져부러. 마치 귀를기울이면 남주....




큰 사건 사고 없이 전개되는 잔잔~한 이야기다. 두 사람이 만났고,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되고, 헤어지는 이야기! 그런데 캐릭터 설정이 워낙 단단해서, 스토리를 쭉 끌고 간다. 여주는 딱히 말할 게 없는데, 남주가 아주 탄탄하다.


남주는 조급하다. 하고 싶은 일은 학교에 없는데,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학생이니까. 그래서 억지로 학교에 갈 때마다 꾸준히 나오는 독백이, '어린아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사춘기 갬성에 공감되지 않는지?


그리고, 얼핏 남주는 몸만 어릴 뿐 정신이 성숙한 듯 보이지만 역시 아직은 감정적이다. 꿈을 숨긴다든가, 일진의 뺨을 친다든가, 냅다 고백을 해버린다든가, 차이니까 울컥한다든가... 이 모든 게 이해되는 이유는, 남주가 15살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주가 여주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운명적이다. 일단, 남주의 가정환경! 남주의 엄마는 이혼 후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썩 가정에 충실한 사람은 아니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듯. 이는 남주 형의 대사에서 알 수 있다. "엄마가 나이에 비해 동안이잖아. 고생을 안 해서 그래. 대신 네가 늙고 있는 거고." 그런데, 형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생을 돌보기보단 여친을 더 챙기는 듯. 실제로 형은 여친과 동거하기 위해 집을 나갔다.


남주의 일상이 뻔히 보인다. 형을 대신해서 철 없는 엄마를 뒷바라지 했겠지. 남주는 구두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홀로 해결한다. 직접 돈을 벌고 독학한다.


나는 연애할 때의 인간 군상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주는 쪽 vs 받는 쪽. 말하자면 남주는 주는 쪽이다. 보살펴 주는 쪽. 이미 가정 환경이 그랬다. 그런데도................굳이! 또! 큰일을 겪어서 미각까지 잃어버려 직장도, 감정도 불안정하고,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한 여주에게 끌린다. 마치 관성처럼. 습관적으로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여주는 보살핌을 받는 쪽에 가깝다. 전남친이 마지막까지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아........팔자란 무엇인가 ㅠㅠ



물론, 모든 커플이 일관되게 한 포지션으로만 가는 건 아니다. 주기만 하다가도 받을 때가 있고, 받기만 하다가 줄 때도 있으니까.



여하튼, 나이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니까 파격적인 소재라, 줄거리만 보면 '대체 이게 왜 명작이지?' 싶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 아니고,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위로한다는 것이다. 웹소설로 치면, 쌍방 구원 엔딩!

남주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여주)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위로받았고, 여주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됐을 것이다.



또, 여러모로 디테일하다고 생각됐던 부분은 직업이다. 신발은 의미가 있는 선물이다. 일본에서도 그런 듯하다. 대체로 새출발을 응원한다는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남주의 꿈이 뭐라고? 구두 디자이너. 남주는 첫 작품으로 여주의 구두를 만들어 주며, 언젠가 이 사람이 제대로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캐릭터 설정, 소재, 상징성, 떡밥, 모두 조우아써. 그래서 12년째 보고 있다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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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or 폭우만 반복되는 25년 여름에. 비가 오던 날 수채화를 그리면서 언어의 정원을 두 번 돌려 보다가 문득 남주의 팔자를 생각해 보았다.



이상,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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