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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May 11. 2024

상처

감정으로써 아픈 것과는 다른, 살아있는 감각이었다.

상처가 났다. 새벽에 칼질을 하다가 크게 베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피가 많이 나서 응급실에 갔다. 상처가 났지만 건강하기에 택시를 불러 내 발로 응급실에 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실은 아버지가 있던 병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병원 자체에 익숙하다. 쉽게도 응급실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접수부터 하고 오세요."

지금 이렇게 피가 나는데, 접수부터 하라니. 환자 보호자로서는 쉽게도 드나들던 응급실 입구는 환자로서는 들어가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알고 있다. 이곳은 오늘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잘은 모르지만 이 응급실에서 오늘도 한 두 명쯤은 죽을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들은 이 하루를 매일매일의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인 상처 정도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고분고분 접수부 터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려 응급실에 들어갔다. 내 침상이 있다. 오랜 병원 생활에 처음으로 내 침상을 배정받았다. 드디어 환자가 되었다. 침상, 좁디좁은 보호자 간이 의자에서 쪽잠을 자면서, 아버지의 침상에 한번 누워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재활 테스트를 하러 갔을 때, 잠시 빈 아버지의 침상에 누워보았다. 열악한 보호자의 자리와는 다르게 침상은 안락했다. 이번에는 환자로써 침상에 누웠다. 환자로 눕는 침상은 그때만큼 안락하진 않았다.


침상에 누워 휘도 높은 병원 천장등을 바라보자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문득, 손이 꽤 아픈 것 같았다. 피도 꽤 많이 났고. 이걸 꿰매려면 꽤 아프려나. 새삼 겁도 조금 났다. 오랫동안 병원에서 생활했지만 환자의 역할로 병원 침상에 누우니 새로운 기분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신 아파줄 수는 없다. 내 뇌와 연결된 말초신경계의 통각은, 감정으로써 아픈 것과는 다른, 살아있는 감각이었다. 아프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내 손이 다쳐서야 알았다. 문득, 아버지가 침상 위를 뒹굴며 수많은 링거줄을 꼬이게 만들었을 때, 나는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감각은 몰랐던 것을 알았다.


당직 간호사가 커다란 통을 끌고 왔다.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만한 통은 핏물이 반쯤 차 있었다. 그리고, 1리터짜리 생리 식염수 4통의 뚜껑을 열어 열지어 세워놓았다. 그리고는 상처난 내 손을 핏물 통 위로 가져갔다. 지혈했던 수건을 풀자, 피가 다시 샘솟아 나왔다. 상처부위가 잘 보이지 않는지, 상처를 더 벌리며 식염수를 부었다. 1통, 2통, 3통, 4통을 다 쏟아 부워도 상처가 잘 보이지 않자, 식염수 통을 더 가져왔다. 그때부터는 조금 어지러워 몇 통을 더 가져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저.. 어지러운데요."

간호사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기어코 내가 정신을 잃고 나서야 간호사는 나에게 관심을 가진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다시 한번 내가 어디이고, 어째서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지 생각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세네 명의 간호사가 나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있었다. 이제야 걱정스럽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간호사에게 대답을 하면서, 천정의 조명이 너무 환하고 하얗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눈을 떴을까. 이토록 차가운 조명에 눈을 떴을 때 이곳이 병원이구나, 맞다, 내가 다쳤구나, 나의 일상은, 나의 몸은, 전과 다르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당직 외과의는 한참을 기다린 후에 왔다. 어쩌면 오늘 당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덜렁이 환자가 새벽에 응급실에 와서 자던 잠을 멈추고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환자에겐 무관심한 태도로 내 손을 꿰맬 준비를 했다. 말이 없는 그는 상처부위에 마취주사를 놓을 때는 좀 아프다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환자에게 '아프다'라고 미리 말을 하는 것은 정말 많이 아프다는 뜻이다. 나는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꿰매는 일은 오래 걸렸다. 다 꿰매고 나니 새벽 네시쯤 되었다. 다시 추가로 수납을 하고, 약을 받고 썰렁한 새벽거리에 나서니, 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싶었다. 아무래도 2022년은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내일은 또 아버지 면회를 가야 하는데, 잘 시간이 많이 없다. 이 손으로 아이를 안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된다. 


다음날, 아버지의 면회는 취소했다. 대신에 며칠이 더 지나, 외래 진료를 핑계로 한 면회 외출을 갔다. 붕대를 감은 내 손을 보고 아버지는 연신 말했다.

"야, 그건 아니다. 야, 그건 아니다."

아버지가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어로 내 손을 걱정하는 것이 웃겼다. 대체 아버지가 날 걱정할 상황인가.


외래 진료를 핑계로 한 외출은, 뒤늦게 찾아낸 방법이었다. 아무리 코로나라고 해도, 환자는 외래진료가 필요한 일이 있고, 이를 막지 않았다. 입원 중에는 일체의 접촉이 불가하지만, 막상 외래 진료를 가면 같이 차도 타고, 밥도 먹고, 반나절 이상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전에 입원했던 병원의 신경외과 외래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임플란트 치료도 다녀오고, 골절 수술한 부위도 확인하러 다녀오는 식으로 외래 외출을 잡아갔다. 그전에 MRI 사진상에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소견도 받아, 대학병원에 외래 진료도 신청했다. 아버지가 당장 뇌출혈로 전원을 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옮기기 어렵던 대학병원이지만, 신규로 외래 진료를 신청하니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료를 마다하진 않았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서울의 큰 병원에 진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병원에서는 기존 병원에서의 CT 나 MRI 자료는 신뢰하지 않으니, 새로 촬영해야 했다. 그렇게 처음 예약을 하고 진료 한번, MRI 촬영 예약을 잡고 또 촬영 한번, 이렇게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게, 이제야 대학병원의 소견을 들으러 가는 것이다. 오늘 외래에는 누나도 함께 했고, 날은 화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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