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다가 우연히 영화 <플립>의 재개봉 소식을 들었다. 먼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첫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부러움이 앞섰다. 당시 영화관에서 못 봐 아쉬운 영화이자, 언젠가 똘방이와 함께 보고픈 영화이기도 한 <플립>.
얼핏 보면 순수했던 그 시절 첫사랑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만 않다. 주인공들의 성장 스토리이자 이들의 조용히 시끄러운 일상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교훈을 안겨준다. 그 과정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유쾌하다. 그리고 그들은 쉼 없이 빛난다.
여기서 그들은 비단 청춘들만이 아니다. 브라이스의 할아버지 챗, 줄리의 부모님, 발달장애가 있는 삼촌 대니얼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인물이 찬란히 빛나는데, 유독 빛을 잃은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브라이스의 아빠 스티븐이다.
아저씨는 겉으로는 말쑥하고 괜찮은데 그 아래에 뭔가가 썩고 있는 것 같았다.
줄리의 표현이 정확하다. 스티븐을 보면 엄청난 분노가 차오르는데, 나중에는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이토록 삐뚤어졌는지 궁금하고, 안쓰러워진다.
영화는 줄리와 브라이스가 각자의 시점을 내레이션으로 전하며 흘러간다. 같은 상황이라도 서로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이고, 오해하는지. 내 마음대로 섣불리 상대를 추측하고 판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줄리 역을 맡은 배우는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꼬맹이 줄리가 처음 등장할 때 오히려 브라이스가 줄리에게 반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줄리는 (좋은 쪽으로) 보통 아이가 아니다.
항상 풍경 전체를 봐야 한단다. 그림은 그저 풍경을 옮겨 놓은 게 아니야. 소는 그냥 소고, 초원은 그냥 잔디와 꽃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그저 빛줄기일 뿐이지만, 모든 게 한데 어우러지면 마법이 되거든.
줄리는 아빠의 말을 경청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챗의 도움으로 이내 깨닫게 된다.
할아버지는 부분이 모여서 더 나은 전체가 된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셨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면서 어떤 사람들은 부분보다 전체가 더 못하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옳았다. 많은 친구가 부분보다 전체가 더 부족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브라이스 역시 부분은 괜찮지만, 전체는 별거 아닌 사람이었다. 중학생이 아빠와 할아버지의 말속에 숨은 진짜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나아가 짝남의 시시함을 깨닫다니, 참으로 총명하고 기특하지 않은가. 나는 중학생 때 어땠더라?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줄리 같은 친구를 가진 브라이스가 부러웠다. 줄리야말로 전체가 참 괜찮은 흔치 않은 친구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플립>의 또 다른 대사를 소개한다.
밋밋한 사람도 있고, 빛나는 사람도 있고, 반짝이는 사람도 있지. 아주 가끔은 오색찬란한 사람을 만나. 그럴 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때로는 침묵이 대화보다 서로를 더 친근하게 만들어 준다.
집에 오자 모든 게 똑같아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니얼 삼촌은 지금까지 내게 이름뿐인 존재였지만 이제 우리 가족이다.
영화를 본 시간은 금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나를 포함해 서너 명의 관객이 함께했는데, 이 시간에 <플립>을 보러 온 사람은 서로 어딘가 많이 닮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 뒷모습만 봐도 참해 보이는 여자들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기로 영화를 관람했다. 집이었다면 크게 웃음이 터질만한 장면도 서로를 배려해 소리 없이 살포시 웃었고, 상체를 쭉 내밀고 집중하며 영화에 빠져들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영화의 여운을 느꼈다.
대화는커녕 뒤통수밖에 못 본 사람들이지만, 대화를 나누면 분명 많은 부분이 통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며 관람객과 강한 유대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찬란히 반짝이는 영화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인공들이 챗의 나이가 될 때까지 대하드라마처럼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이 영화가 순식간에 우리가 반짝이던 어느 때로 데려가 그곳에 잠시 정차하느라 일어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우리는 여전히 반짝일 수 있다.
모든 건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