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동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오늘의 목적지는 동인천역의 송현동이다. 송현이라는 동명은 마을의 뒷산인 만수산의 소나무가 많은 데에서 유래되었는데 바로 옆 동네인 송림동의 동명과 유래가 비슷하다.
송현동에 위치한 동인천역 북광장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광장을 바라보며 처음 든 생각은 '여기... 참 특이하다.'오른쪽에는 오래된 시장이 보이고 저 멀리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들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비둘기들까지, 이곳의 이색적인 풍경에 넋을 놓고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우선 오른쪽의 민트색, 하늘색, 분홍색, 살구색 등 예쁜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보이는 시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전부 노포들이었다. 하나하나 찬찬히 구경하며 걸어가고 있으면 살찐 비둘기 무리가 자꾸만 앞길을 막았다. 비둘기를 요리조리 피해서 줄지어 선 가게 중 가장 끝쪽에 있는 진미식당을 발견해 들어섰다.
50여 년 노포, 내장 가득한 순댓국
진미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하긴, 이런 노포에 젊은 여자애가 그것도 혼자 오는 게 흔히 보는 풍경은 아니지 싶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잠시 말없이 바라보시던 아주머니가 “국밥 하나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자리를 잡으며 “네!”하고 대답했다. 가게 안에는 혼자 오신 할아버지 세 분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국밥을 먹고 계셨는데 국밥만 드시는 분도, 소주 한 잔을 기울이시는 분도, 음식을 앞에 두고 티비만 보고 계시던 분도 있었다. 나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자연스레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티비를 보고 있으니 국밥이 나왔다. 큰 은색 쟁반 위에 고추와 마늘, 쌈장, 새우젓, 김치, 깍두기, 공깃밥과 순댓국이 나온다. 푸짐한 상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걸 어떻게 다 먹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댓국은 반투명한 육수에 들깻가루와 다대기가 올려져 있었다. 휘적휘적 잘 섞으니 순대와 머릿 고기, 돼지 곱창이 가득했다. 순대보단 고기와 내장으로 가득 차 있던 순댓국의 비주얼에 조금 긴장했다.
쌈장을 살짝 찍은 마늘로 입가심을 하고 밥 한 숟갈을 국물에 말아 입에 넣었다. 뜨끈하고 진한 육수 맛이 확 풍기는데 이곳이 왜 맛집인지 단번에 이해가 가는 맛이었다. 고기를 조금 베어 먹어봤다. 나는 물에 빠진 고기 특유의 잡내를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히도 진미식당의 고기와 내장은 잡내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의 첫 점심은 성공적이라는 안도와 함께 밥을 절반 뚝 떼어 국에 말았다. 깍두기와 국밥의 조화는 말해 뭐할까! 후루룩 먹다 보니 어느새 거의 다 먹었다. 걱정과 달리 국밥으로 맛있게 배를 채우고 나서 기분 좋게 진미식당을 나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양키시장
진미식당의 뒤편으로 가보니 순대골목이 나타났다. 긴 골목에 빨강, 파랑의 순대국밥 간판들이 달려있다. 중간중간 골동품들도 보였는데 정말 오랜 세월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내가 먹었던 진미식당의 간판도 보였다. 순대골목이라 하지만 많은 가게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조금 더 걸으니 거미줄과 녹슨 철판들이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골목이 나온다. 대부분 셔터가 내려져 있거나 문을 열지 않은지 오래된 듯한 차가운 점포들만이 남아있는 이곳이 양키시장이었다.
양키시장의 다른 이름은 '송현자유시장'으로 1930년대에 세워진 아주 오래된 종합시장이다. 이름이 굉장히 독특한데 해방 후 인천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미군 물건들을 취급하면서 자연스레 '양키시장'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무서움을 뒤로하고 더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벽과 지붕, 손타지 않아 삭아버린 자전거가 보였다. 낡고 버려진 거리가 주는 씁쓸하고 허무한 감정이 밀려와 거리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뒤돌아서 양키시장을 바라보면서 미국제품이라면 최고로 치던 그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미국제품이 최고라고 여기며 활기찼던 이 골목은 어느새 싸늘한 바람만이 부는 휑한 골목이 되었다. 이곳은 곧 재개발이 된다고 하는데 오래된 골목의 역사가 사라진다고 하니 아쉽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송현동의 아담한 시장
조금은 공허한 마음으로 양키시장을 나오니 길 건너의 송현시장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조금 앞으로 걸어가 송현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상권이 아예 죽어버린 양키시장과 다르게 다양한 반찬과 채소, 물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송현시장.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정돈이 되어있는 시장이었다. 북적이지 않아 여유롭게 시장을 구경하는데 가게의 위생도 좋아 보이고 깔끔한 인상을 받아서 이 근처에 산다면 여기로 장 보러 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장의 길이도 길지 않아서 한 바퀴 더 구경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언덕 너머 60년대 달동네로
다음 목적지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다. 나의 기대만큼이나 높은 곳에 있어 길고 높은 언덕을 헉헉 대면서 올랐다. 언덕을 넘으니 바로 보이는 달동네 박물관. 넓은 광장이 있고 바로 옆으로는 송현근린공원이 조성되어있어 강아지와 산책하거나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입구를 찾는 도중 멀리서 말뚝박기를 하는 사람 모형이 보였다. 중학생 때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자주 했었던 추억의 놀이를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가보았다. 그곳에는 말뚝박기 외에도 우물과 항아리, 달동네 마을이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들이 실감 나는 모형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티켓 부스가 보인다. 어른은 1,000원, 청소년은 700원, 어린이는 무료다. 티켓을 구매하니 먼저 오른쪽 전시장으로 가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신다. 내부로 들어서니 촌스러운 옷가게, 뮤직박스가 있는 다방, 문구점과 김장을 하는 아줌마들 등이 꽤 실감 나게 전시되어 있다. 6~70년대 레트로 감성이 느껴지는 공간에 있으니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묘한 설렘을 느꼈다. 한 바퀴 다 돌았을 때쯤 창문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니 어두운 저녁의 달동네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캄캄한 지붕들 사이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조금은 으스스한 모습이었다. '아, 여기가 달동네구나.' 간접적으로나마 달동네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1층으로 내려와 먼저 터치스크린으로 향했다. 이 공간에 대한 설명과 실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사진을 구경하며 달동네의 추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전시관으로 들어서니 스케일이 생각보다 더 컸다. 정말 달동네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드는 공간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송현상회에는 갖가지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옛날의 상표들이 그대로 있어 신기했다. 그 맞은편 은율솜틀집에는 솜을 짜서 이불을 만들고 있었다. 인천은 우물이 적고 수질이 좋지 않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았다고 하는데 물을 길어 어깨에 지고 가는 소년의 모습도 잘 재현되어 있어 그 시절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갔다. 기대보다 더욱더 흥미로운 전시에 신이 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빨간 불빛이 뿜어지는 푸세식 변기.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대사가 절로 생각나는 광경이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는 범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으스스한 골목길이 나온다. 괜스레 무서워진 나는 쭈뼛거리며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질 때쯤 저 멀리서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었다. 아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면 연신 엄마를 불러대는데 그 모습을 보니 무서움이 싹 사라졌다.
이번에는 달동네에서도 꽤 집 구조를 갖춘 곳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가 티비로 레슬링을 보고 있는 안방과 부엌, 옥상도 있는 집이다.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길래 신발을 벗고 발을 디디니 난방이 틀어져 있다. 이곳에 있으니 '이 정도면 부잣집이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앉아 방안을 구경하다가 나왔다. 전시를 나오면서 기념품이나 옛날 과자를 파는 공간으로 가보았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장사는 하지 않았다. 눈으로 구경하고 있으니 내 옆으로 어른 3명이 다가왔다. 전시되어있는 책을 보면서 서로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이 박물관에서 가장 신난 사람들로 보였다. 어쩌면 이곳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좋은 전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회고(回顧)
달동네였던 이곳은 이제 길쭉한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나는 아파트 산을 터벅터벅 내려와 들어갈 곳을 찾았다. 하염없이 걸으니 눈앞으로 멋진 카페가 나타났다. 신상 대형 카페인 앤드아워. 송현동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있는 화평동에 있다. 송현동에는 이런 예쁜 대형카페가 없어서 그런지 이곳은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는데도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앤드아워에 들어가서 직원분이 추천해주셨던 소금빵과 마늘바게트, 바닐라라떼를 주문했다. 직원들의 친절함과 가게의 따뜻함 덕분에 꽁꽁 얼어있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카페는 1층과 2층, 야외테라스가 있고 2층은 노키즈존으로 운영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건물의 뼈대인 철제가 보이는데 시원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멋스러웠다.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으니 몸의 긴장이 풀려왔다. 그렇게 노곤해진 몸을 쉬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아파트들과 시장이 섞여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던 송현동, 올드하다고 느꼈던 첫인상과 달리 돌아다닐수록 정이 가는 동네였다. 오래된 노포에서는 투박하지만 따스한 손맛이 느껴졌고, 달동네 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시절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미소에 나도 웃음이 지어졌다. 폐허가 된 양키시장에서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꼈고, 송현시장에서 다시 사람들이 뿜어내는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송현동은 이곳에 살던, 또 사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동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동인천 특유의 감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동네이자 사라져가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지만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생각지도 못한 아련한 풍경과 마주하기도 한다. 추운 겨울 인천 송현동에서 느낀 감정은 아마 마음 한편에 남아 계속 살아 숨 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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